▲시집 한 줄 평
“자아와 타자의 삶을 횡단면으로 잘라 그 속을 들여다보다가 애도로 마음이 기운다.”
▲시 한 편
<꽃길만 걷자던 우리는> - 옥효정
유리 주전자 속 가부좌한 목련꽃 한 송이
섭씨 100도의 물로 관불식을 마쳤다
종잇장 같은 육신에 피가 돌고
가장 화려했던 그해 봄날이 되살아났다
죽어서 산 자와 살아서 죽은 자의 해후
만개한 웃음엔 소리가 없다
꽃길만 걷자던 우리는
서로의 봄을 묻는 대신
침묵이 길어질 때마다 찻잔을 들었다
말 없는 뿌리가 나무를
밀어 올리고 꽃 피우는 일
찻잔에 풀어지는 꽃의 생애가 눈부시다
우리도 잘 우러나는 중
▲시평
“꽃길만 걷자”는 말 앞에는 ‘이제’라는 부사가 제격이다. 지난 세월이 어찌 됐든, 지금부터 앞으로는 꽃길, 즉 좋은 일만 있을 거라는 희망이다. 우리는 지금 꽃차를 앞에 두고 마주 앉아 있다. 만나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좋은 일은 아닐 듯하다. 무언가 서먹한 분위기가 감지된다. 오랜만에 만났지만, 서로 안부를 묻는 대신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침묵하고 있다. 아니 어쩌면 처음 만난 사이일 수도 있다. 처음엔 어색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도 잘 우러나는 중”이기 때문이다. 여하튼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서로를 알아가는 시간이 필요하다. 성급하면 일을 망친다. 어색함 때문인지, 시적 화자는 앞에 앉은 사람이 아닌 “유리 주전자 속” 목련꽃에 시선을 준다. “섭씨 100도”로 끓는 물 속의 목련꽃이 가부좌한 듯하다. 관불식은 초파일에 향수·감차·오색수(五色水) 따위를 아기 부처상의 정수리에 뿌리며 과거의 죄악과 자신의 번뇌를 정화하는 의식이라 한다. 꽃차가 끓는 것을 보고 관불식으로 인식하는 것은 시적 화자가 번뇌에 놓여 있다는 뜻이다. 이 만남 이후 삶의 여정에 반전이 찾아온다는 복선이기도 하다. 기본적으로 물은 생명을 살리고, 끓는 물은 살균이나 화상을 유발한다. 한데 이 시에서 끓는 물은 오히려 “종잇장 같은 육신에 피가 돌”게 한다. “가장 화려했던” 순간에 죽은 목련꽃의 부활이다. “죽어서 산 자”는 목련꽃의 의인화, “살아서 죽은 자”는 시적 화자라 해석할 수 있다. 살아 있어도, 살 것 같지 않은 상태를 말한다. 일상을 살아가지만,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거나 의식이 죽은 상태라는 뜻이다. 한쪽은 서서히 부활하지만, 한쪽은 서서히 죽어간다. “만개한 웃음”은 가장 화려한 순간에 잘린 목련꽃이면서 앞에 앉은 사람의 현재 상황이다. 그래서 더 시적 화자의 “침묵이 길어”지고, 그럴 때마다 괜히 “찻잔을 들었다”가 놓는다. “가부좌한 목련꽃”에서 우러난 꽃차를 마시는 건 고요한 내면과 만나는 일이다. 명상 이후 한 사람의 생애나 가계(家系)를 잇는 숭고함을 겸허히 인정할 때 관계는 서서히 회복된다. 뒤로 갈수록 시적 분위기와 관계가 살아난다. 정화를 전제로 한 관계는 향기롭고, 그 길은 눈부신 “봄날”이다. (김정수 시인)
▲김정수 시인은…
1990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했다. 시집 『사과의 잠』 『홀연, 선잠』 『하늘로 가는 혀』 『서랍 속의 사막』과 평론집 『연민의 시학』을 냈다. 경희문학상과 사이펀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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