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려한 자연경관 속 곳곳에 문화유산
(영월=연합뉴스) 김정선 기자 = 강원도 남부 내륙의 영월군은 수려한 자연경관과 조선 제6대 임금 단종(1441∼1457)의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는 고장이다.
계절이 바뀌어도 푸르름을 간직한 청령포와 세계유산 조선왕릉 가운데 서울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장릉은 그 흔적을 고스란히 전해준다.
영월 하면 떠오르는 대표 명소이자 소중한 문화유산을 직접 찾아가 봤다.
◇ 서강과 층암절벽이 어우러진 선돌 풍경
영월은 태백산맥, 차령산맥, 소백산맥이 뻗어있는 산간 지역이다.
푸른빛의 나무들로 이뤄진 산의 풍경이 서정적으로 다가왔다.
단종은 1441년 문종과 현덕왕후 사이에서 태어났다. 1452년 문종이 세상을 떠나자 어린 나이에 즉위했다.
다음 해 숙부인 수양대군(세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조정을 장악했다. 2년 뒤 단종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이후 신하들의 단종 복위 계획이 발각되자 노산군으로 신분이 강봉된 채 영월로 유배됐다.
단종은 유배지인 청령포로 가던 길에 선돌이 보이는 곳에서 잠시 쉬어 갔다고 한다.
취재팀은 선돌을 먼저 찾았다. 인근에 다다르자 해발 320m의 소나기재 정상이라는 표지판이 보였다.
그러고 보니 도로가 꽤 오르막길이었다.
잘 정돈된 데크 길을 몇분 걸은 뒤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함성이 절로 나왔다.
서강이 둥글게 휘감아 나가고 왼쪽에 선돌이 수직으로 굵고 높게 솟아올랐다.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에 따르면 단종이 이와 관련해 우뚝 서 있는 것이 마치 신선처럼 보였다고 해 선돌이 됐다는 전설이 있다.
필자는 선돌의 입체감이 두드러져 아찔한 느낌이 들었다. 절벽을 쪼갠 듯한 선돌의 높이는 약 70m에 이른다.
고생대 석회암에 갈라진 틈을 따라 암석이 부서져 내리면서 기둥 모양으로 남게 된 것이다.
인근에는 밭과 하천 부지, 민가가 있었고 저 멀리 산의 윤곽이 그림자처럼 겹쳐 보였다.
◇ 배를 타고 건너간 청령포와 송림
선돌에서 차량으로 10분이 채 안 걸려 청령포에 도착했다. 이곳도 명승이다.
삼면이 강에 둘러싸였고 뒤쪽의 봉우리는 꽤 험준해 보였다.
전체적으로 보면 강이 둥그렇게 에워싼 곳에 육지가 섬처럼 떠 있다. 곡류 형태를 볼 수 있는 자연학습 장소이기도 하다.
청령포 주차장을 지나니 한 쌍의 남녀가 손을 맞대고 선 동상이 있다.
단종과 그의 왕비 정순왕후(1440∼1521)를 표현한 작품이다.
안내판에는 이들이 천상에서의 재회를 통해 못다 한 사랑을 이루고 영면에 들기를 기원하는 의미로 동상을 세웠다고 적혔다.
한양에 남게 된 정순왕후는 80세 넘게 홀로 지냈다.
청령포를 둘러싼 서강도 지형을 따라 휘감아 나갔다. 안쪽 송림이 청명하게 보였다. 배를 타고 강을 건넜다.
안쪽에는 단종이 머물던 어소(御所)가 있었으나 없어졌고, 영조 때 그 위치를 알리는 비석을 세웠다.
2000년에 기와집을 그 주변에 재현하고 부속 건물로 초가집을 세웠다.
영조는 민간인의 출입을 막기 위해 별도의 금표비도 세웠다.
주변을 걷다가 수령 600년으로 추정되는 천연기념물 관음송을 찾았다.
단종의 비참한 모습을 지켜봤다고 해서 볼 관(觀), 그의 슬픈 목소리를 들었다 하여 소리 음(音)자를 붙인 소나무다.
크기가 남달라 눈에 띄었다. 높이 30m 정도인데, 아랫부분에서 줄기가 두 갈래로 나뉘어졌다.
단종이 이 줄기에 걸터앉아 시간을 보냈다는 전설이 있다.
청령포에선 볼거리가 많다.
데크 길을 따라 올라가면 단종이 한양 땅을 그리워하며 돌을 쌓았다는 망향탑, 그가 해 질 무렵에 한양을 바라봤다는 노산대가 있다.
아쉬운 마음으로 배를 타고 나와 청령포를 뒤돌아봤다.
강물 위로 방문객을 실어 나르는 배, 청령포의 송림, 그 뒤를 병풍처럼 둘러싼 산, 푸른 하늘과 흰 구름이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선착장에서 걸어서 5분 안팎 거리에는 1984년에 세워진 '왕방연 시조비'가 있다.
뒷면을 찾아보니 "1457년 금부도사 왕방연이 단종께 사약을 진어하고 한양으로 돌아가는 길에 비통한 심정을 가눌 길 없어 청령포를 바라보면서 시조를 읊었던 곳"이라고 새겨졌다.
앞면에는 "천만리 머나먼 길의 고운 님 여의옵고"로 시작되는 한시의 뜻풀이가 적혔다.
◇ 단종의 삶이 깃든 영월부 관아
조선시대 관청이었던 영월부 관아는 2016년 사적으로 지정됐다. 시내에 기와로 된 커다란 정문이 보여 건물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단종은 2개월 정도 청령포에서 지내다가 홍수가 나자 이곳으로 거처를 옮겼다.
관풍헌을 침전으로 사용했고 누각인 매죽루(梅竹樓)에 자주 올랐다고 한다.
그가 이곳에서 자신의 처지와 비통한 심정을 읊었다는 자규시(詩)와 자규사(詞)가 전해 내려온다.
후대 사람들이 이곳을 자규루(子規樓)로 불렀다. 현재는 매죽루, 자규루 현판이 누각의 각각 다른 방향에 걸려있다.
자규루에 올라가니 현대에 들어와 걸어놓은 자규사 현판이 보였다. 한자와 함께 한글 뜻풀이가 새겨져 있다.
"달 밝은 밤 두견새 울 제/시름 못 잊어 누 머리에 기대었노라/네 울음 슬프니 내 듣기 괴롭도다/네 소리 없었던들 내 시름 없을 것을/세상에 근심 많은 분들에게 이르노니/부디 춘삼월 자규루에는 오르지 마오"
당시 단종의 또 다른 숙부인 금성대군이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과 단종 복위를 계획했으나 실패로 돌아갔고 17세였던 단종은 이곳에서 짧은 생을 마감했다.
◇ 서울서 가장 먼 조선왕릉 영월 장릉
영월 호장(향리직 우두머리) 엄흥도는 단종의 시신을 수습해 현재의 장릉(莊陵) 자리에 가매장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후 240여년이 지난 1698년(숙종) 단종의 신분이 회복됐고 능의 이름이 장릉이 됐다.
장릉은 지금까지 가 봤던 일반적인 조선왕릉과는 확연히 달랐다.
향로와 어로가 일직선이 아니라 중간 지점에서 직각으로 꺾였다. 평지에서 능까지의 경사는 가팔라 보였다.
정자각도 보통은 능침이 정면으로 올려다보이는 곳에 배치되는데, 여기는 능침 서쪽 아래에 자리 잡았다. 지형 때문이라고 한다.
단종을 위해 목숨을 바친 신하 268명의 위패를 모신 장판옥(藏版屋)이 있는 것도 장릉만의 특징이다.
단종의 시신을 거둔 엄흥도의 충절을 기리기 위한 정려각도 있다.
왕릉까지 올라가는 길은 별도로 마련돼 있다. 비탈길을 잘 정비해뒀기 때문에 산책하듯 걸었다.
가까이서 본 장릉은 말 그대로 간소해 보였다.
궁능유적본부 누리집에선 추존 왕릉 제도에 따라 장릉의 병풍석과 난간석, 무석인이 생략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영월군에 취재 요청을 미리 했기에 문석인(문인 모습의 석물)에 다가가 자세히 살펴볼 수 있었다.
두께감과 묵직함이 느껴진다기보다는 비교적 부드러운 인상이었다.
석호(호랑이 모양의 석물)는 세로로 여러 선을 그어놓은 듯한 눈썹, 가로선으로 길게 표현된 것 같은 수염이 흥미로웠다.
북한에 있는 2기를 제외한 조선왕릉 40기는 2009년 세계유산에 등재됐다. 대부분 수도권에 있는데, 영월 장릉이 서울에서 가장 먼 곳에 있다.
취재팀과 동행한 이갑순 영월군 문화관광해설사는 "영월에선 단종과 그의 장릉이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고 말했다.
장릉에선 매년 한식일에 단종 제례가 거행된다.
'충절의 고장' 영월의 대표 축제인 단종문화제도 매년 이어지고 있다.
이 해설사는 장릉의 원찰인 보덕사도 방문할 것을 권했다. 인근 보덕사로 향했다.
사찰 극락보전 옆에는 별도의 단종어각이 있다.
단종어각에 들어가 2021년 봉안된 단종 어진 앞에서 단종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봤다.
단종이 꿈에서 봤다고 해 금몽암으로 이름을 고쳐 불렀다는 근처 별도의 암자는 보수 공사 중이었다.
◇ 단종에게 바친 어수리 나물
시장 골목의 메밀전병은 여행객의 별미
영월이라고 하면 손꼽히는 나물로 곤드레나물과 함께 어수리가 있다.
어수리의 애초 이름은 '어누리'였으나 이곳 청령포로 유배 온 단종에게 영월지역 백성들이 이 나물을 대접했고, 그때부터 '임금에게 드리는 나물'이라는 의미로 어수리라 불려졌다고 한다.
취재팀은 읍내 식당에서 어수리 나물밥과 제육 정식을 먹었다. 밥에선 나물 특유의 향이 느껴졌다.
단종이 거쳐 간 곳은 빼어난 자연풍경을 지닌 곳이 많았고, 그의 발자취는 문화유산으로 남았다.
여러 곳을 둘러보고 어수리 나물밥까지 먹고 나니 여행객으로서 이 지역에서 맛볼 수 있는 또 다른 별미를 찾아보게 됐다.
다음날 이른 아침 메밀전병이 유명하다는 읍내 서부시장에 갔다.
고소한 기름 냄새가 안쪽에서 흘러나왔다. 부지런한 상인 몇몇이 전을 부치고 있었다.
메밀전병에선 잘게 썬 김치의 아삭하고 깔끔한 식감이 살아있었고, 전병 피는 쫄깃했다.
소금에 절인 배추를 넣은 메밀전은 간이 잘 맞았다. 맛에 감탄하며 느낀 건 충족감만이 아니었다.
묵묵히 손끝으로 전을 부치는 상인들의 모습 속에서 소박한 힘과 일상을 덤덤하게 살아가는 견실함의 가치를 떠올리기도 했다.
어쩌면 이러한 풍경과 가치가 삶의 또 다른 문화유산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 이 기사는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5년 10월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jsk@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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