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추석을 앞둔 지난달 30일 대전 도심 곳곳에 명절 인사 현수막이 내걸려 있다. 이준섭 기자
명절을 앞둔 대전 도심이 정치인 얼굴로 가득 차 있다. 전봇대와 가로수, 교차로 난간마다 색색의 현수막이 바람에 펄럭이며 사람들의 시야를 붙잡는다. 문구는 ‘즐거운 한가위’라는 다정한 덕담으로 시작하지만 그 옆에 큼지막하게 인쇄된 이름과 직함이야말로 진짜 주인공이다.
‘○○의원’, ‘○○위원장’ 같은 직책과 환한 미소가 한눈에도 선거용 명함임을 직감하게 한다. 30일 오후 대전의 한 도심 풍경이다. 한 장 걸리면 그 옆에 또 한 장, 한 정치인이 내걸면 다른 정치인도 뒤따라 걸며 거리는 삽시간에 선거 운동장으로 변한다. 도심은 명절 풍경보다 후보 얼굴이 빼곡히 채운 현수막 전쟁터다. 추석은 정치인들에게 사실상 공짜 홍보의 황금기이고 시민에게는 원치 않는 선거판 예고편이 된다.
거리를 걸으면 풍경은 더 기묘하다. 도로 건너편에서는 파란 바탕에 미소 짓는 얼굴이 손을 흔들고 그 맞은편에는 붉은 바탕 위 또 다른 얼굴이 정면을 응시한다. 마치 선거판의 맞대결을 연출한다. 전·현직을 가릴 것 없이 너도나도 현수막을 내걸며 거리는 경쟁의 무대가 된다. 시민 눈에는 덕담보다 얼굴이 먼저 꽂히고 각양각색의 미소 뒤에는 사실 ‘내년 지방선거를 잊지 말라’는 노골적 신호가 숨어 있다.
한 40대 직장인은 “정말 명절 인사라면 차라리 카드 한 장이 낫겠다. 거리 곳곳에 얼굴을 강제로 각인시키는 느낌이 불편하다”라고 말했다. 명절의 따뜻한 인사말은 표면일 뿐 현수막의 본심은 따로 있다는 지적이다.
문제는 이런 풍경을 막을 법적 장치가 사실상 없다는 데 있다. 정당법은 정책이나 정치적 현안을 홍보하는 행위를 정당 활동으로 보장하고 옥외광고물법도 규격과 수량만 제한할 뿐 내용에는 손을 대지 못한다. 결과적으로 합법을 가장한 사전 선거운동이 거리를 점령하고 있는 셈이다.
2022년 말 법 개정으로 신고나 장소 제한 없이 현수막을 걸 수 있도록 하면서 난립은 본격화됐다. 난리가 나자 지난해 현수막의 수량과 기간·설치 위치 제한 규제가 다시 도입됐지만 현실에서는 지켜지지 않는다. 읍·면·동별 2개, 게시 기간 15일, 교차로와 횡단보도 설치 금지, 하단 높이 제한 등 조항은 종이 위에만 남았다. 현장에서는 바람에 펄럭이는 얼굴이 모든 규정을 비웃듯 걸려 있다.
행정은 속수무책이다. 이맘때면 현수막과 관련한 항의가 하루에도 수십 건씩 들어온다. 그러나 불만은 쏟아지지만 담당자가 처리할 방법이 마땅하지 않다. 강제 철거로 이어지기엔 법적 근거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한 지자체 관계자는 “민원이 매일 수십 건 들어와도 현수막을 떼기라도 하면 그걸 뗐다고 정치인들이 난리를 치는 통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 결국 정치권이 스스로 자제하길 바랄 수밖에 없지만 그걸 기대하긴 어렵지 않겠냐”라고 체념했다. 정치권의 얼굴 홍보전이 계속되는 동안 행정은 뒷수습만 맡은 채 보이지 않는 전쟁의 잔해를 치우는 역할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추석 덕담을 빙자한 현수막 전쟁은 올해도 어김없이 반복되고 있다. 하지만 시민이 추석 분위기를 느끼기 전에 가장 먼저 마주하는 건 송편이나 곶감이 아니라 서로 경쟁하듯 웃고 있는 정치인들의 얼굴이다. 명절을 포장지로 삼은 정치의 속살은 풍자조차 무색한 우리의 선거 문화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글·사진=이준섭 기자 ljs@ggilbo.com
Copyright ⓒ 금강일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본 콘텐츠는 뉴스픽 파트너스에서 공유된 콘텐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