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매거진=윤나애 작가] 이사를 했다. 이사를 앞두니 집이 집 같지 않았다. 며칠만 지나면 떠나야 할 공간이라고 생각되어 마음이 풀어졌다. 그러다 보니 정리도 대충 하게 된다. 얼룩이 묻어도 신경 쓰이지 않았고, 먼지가 쌓여도 모른 척했다. 어차피 청소를 하지 않아도 곧 남이 들어와 알아서 닦을 것이다. 그러니 방치해도 된다는 생각이 슬그머니 스며든다. 사람 마음이란 이렇게 간사하다. 떠날 수 있다는 생각이 들면 책임도 쉽게 내려놓는다.
우리의 지구는 다르다. 아쉽게도 지구는 이사 나가듯 다른 집으로 옮길 수 있는 공간이 아니다. 지금 여기에 얼룩을 남기면 그 얼룩은 우리 모두의 몫이 된다. 치우지 않고 버려둔다면 결국 그 속에서 우리가 살아야 한다. 떠날 수 없는 집에서라면 우리는 스스로 고치고 깨끗하게 해야만 한다.
독일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화가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Caspar David Friedrich,1774–1840)는 인간을 압도하는 자연의 힘을 집요하게 그려낸 작가다. 그의 작품에서 인간은 언제나 작지만 자연은 크고 위대하다. ‘안개바다위의 방랑자(wanderer above the Sea of Fog, 1818)’속 높은 절벽 위에서 거대한 안개 바다를 내려다보는 뒷모습, ‘오크숲의 수도원(The Abbey in the Oakwood, 1810)’에서 볼 수 있는 폐허가 된 수도원 앞의 작은 무리... 인간은 주인공이 아니라 자연 앞에 겸손한 관객일 뿐이다.
그 중 ‘얼음의 바다(The Sea of Ice, 1824)’ 속 풍경은 꽤 차갑다. 회색빛 하늘 아래, 들쑥날쑥 솟아오른 얼음덩어리들이 마치 부서진 유리 조각처럼 쌓여 있다. 날카로운 빙산은 마치 살아 있는 괴물처럼 뾰족한 이빨을 드러내며 주변을 뒤엎는다. 그사이에 한 척의 배가 부서져 있다. 선체는 기울어져 뼈대만 남았고 거대한 얼음 틈바구니에 끼인 채 더 이상 움직일 수 없다. 배는 더 이상 이동의 수단이 아니라 차가운 얼음 속에 파묻힌 쓰레기처럼 보인다. 이 장면 어디에도 따뜻한 색은 없고 어디에도 인간이 설 자리는 없다. 자연은 거대하고 무자비하며 인간의 문명은 한순간에 무력해진다. 이 그림은 단순한 풍경화가 아니라 인간의 오만에 대한 경고이자 묶인 존재로서의 운명을 보여준다.
프리드리히가 이 그림을 그린 시기는 북극 탐험이 실패로 끝나던 시대였다. 인간은 자연을 정복하고 미지의 세계를 열 수 있다고 믿었지만 거대한 얼음 앞에서 탐험대는 번번이 좌절했다. ‘얼음의 바다’ 속 부서진 배는 바로 그 좌초된 인간의 야심을 상징하는 듯하다.
나는 이 그림을 볼 때마다 지구를 떠올린다. 우리는 마치 이 얼음 속 배와 같다. 지구라는 바다 위에 갇혀 있으면서도 자꾸만 떠날 수 있다고 착각한다. 화성에 도시를 세우거나 다른 별에서 살아보겠다 말하지만, 사실은 당장 떠날 수 없다. 발 디딜 곳은 이 지구뿐이다. 떠날 수 없다면 버리고 망가뜨리기보다 고치고 지켜야 한다.
이번에 이사하면서 수많은 짐을 버렸다. 버리다 보니 스스로 놀랐다. 내가 이렇게 많이 샀던가? 이렇게 쓸모없는 소비를 했던 것인가? 필요하다고 생각해 사들였던 물건들이 막상 버릴 때는 한순간에 쓰레기가 된다. 새집으로 가는 길은 가벼워졌을지 몰라도 그만큼 지구에 쌓아놨단 생각에 묘한 죄책감이 들었다. 지구에서 버린 모든 것들은 결국 지구 어딘가에 남는다. 매립지에 묻히거나 바다에 흘러가고 공기를 오염시킨다. 끝없는 소비와 쓰레기는 곧 거대한 얼음 더미가 되어 언젠가 우리 발밑을 무너뜨릴 것이다.
이제는 버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애초에 소비를 줄여야 한다. 필요하지 않은 것을 덜 사고 쓸모없는 것을 쌓지 않는 것. 그것이 우리가 떠날 수 없는 집에서 사는 길이다.
프리드리히의 그림은 200년 전 작품이지만 오늘날 환경위기를 가장 날카롭게 비추는 거울처럼 보인다. 떠날 수 없는 집, 지구. 우리는 이 안에서 살아야 한다. 그렇다면 선택은 분명하다. 함께 힘을 모아 지구를 고치고 소비를 줄이며 이 집을 더 오래 지킬 수 있도록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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