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컬처 이준섭 기자] 뮤지컬 '레드북'이 관객의 뜨거운 환호 속에 프리뷰 공연을 성황리에 마치며 네 번째 시즌의 막을 올렸다. 이제는 한국 창작뮤지컬을 대표하는 작품 중 하나로 굳건히 자리 잡은 '레드북'은 다시 한번 관객과 시대를 향해 자신 있게 말을 건넨다. 시즌마다 무대에 오른 그 순간, '레드북'은 늘 지금 이 시대에 가장 필요한 이야기였고, 이번 역시 다르지 않다.
배경은 19세기 말, 빅토리아 시대의 런던이다. 사회가 '숙녀'라는 이름으로 여성을 길들이고 침묵시키려 할 때, 한 여성은 말한다. "나를 쓰겠어요. 내 이야기니까." 이 단순한 문장은 곧 이 작품 전체를 꿰뚫는 선언이 된다. '레드북'은 여성의 자율성과 주체성, 그리고 자기 삶을 스스로 선택할 권리에 대한 이야기다. 그러나 이 작품이 가진 울림은 특정한 젠더나 시대에 갇히지 않는다. 그것은 결국 ‘누구나 자기답게 살아갈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기 때문이다.
뮤지컬은 음악과 리듬을 통해 감정을 전달하는 예술이지만, '레드북'은 그 특성을 탁월하게 활용해 묵직한 질문들을 경쾌하게 풀어낸다. 유쾌한 웃음 속에 슬픔이 있고, 명랑한 노래 사이로 치열한 외침이 스며든다. 성 역할, 사회적 규범, 자아의식, 글쓰기의 의미까지. 이 모든 것을 복잡하거나 무겁지 않게, 그러나 결코 피상적이지 않게 관객의 마음에 닿도록 만든다. 그리고 바로 그 균형이 '레드북'이 동시대를 반영하고 앞서가는 방식이다.
이번 시즌은 무대와 영상, 조명, 음악까지 전반적으로 더욱 정교하게 재구성되었다. 시대극 특유의 고전미에 세련된 감각이 더해져 무대는 더욱 풍부해졌고, 시각적으로도 완성도 높은 장면들이 관객을 끌어당긴다. 과거의 이야기임에도 현재처럼 생생하게 다가오는 데에는 이러한 무대 언어의 세련된 통역이 큰 역할을 한다.
무대 위 배우들의 존재감은 그 자체로 또 하나의 서사다. 안나 역을 맡은 옥주현, 아이비, 민경아는 각기 다른 해석으로 '주체적인 여성'이라는 중심 인물을 다채롭게 구현해낸다. 옥주현은 특유의 무게감과 감정의 깊이로 안나의 단단한 내면을 그려내며, 시대와 정면으로 맞서는 인물의 복합성을 설득력 있게 전달한다. 아이비는 생동감 있는 표현력으로 유쾌하고 당찬 안나를 현실적으로 풀어내며,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 인물의 생명력을 부여한다. 민경아는 맑고 섬세한 감정선을 통해 안나의 변화와 성장을 조용히, 그러나 확고하게 그려내며 관객의 깊은 공감을 자아낸다. 세 사람이 만들어낸 세 가지 안나는 결국 한 가지 진실로 모아진다. 그 누구도 대신 써줄 수 없는,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여성의 얼굴이다.
브라운 역의 송원근, 지현우, 김성식 역시 각자의 개성을 녹여내며 인물의 층위를 더한다. 보수적인 신사로 시작하지만, 안나를 통해 자기 안의 균열과 변화를 받아들이게 되는 인물. 송원근은 안정된 연기로 브라운의 내적 갈등을 묵직하게 표현하고, 지현우는 따뜻하고 진솔한 눈빛으로 인간적인 면모를 부각시킨다. 김성식은 섬세한 감정 연기와 에너지 넘치는 무대 매너로 브라운을 새롭게 그려낸다. 안나와 브라운의 관계는 단지 남녀 간의 로맨스를 넘어, 서로 다른 세계관이 만나 변화와 이해를 이루는 과정으로 읽힌다. 그들은 서로를 바꾸려 하지 않는다. 대신, 상대의 다름을 통해 자신을 더 넓히고 깊어지게 만든다.
주조연을 가리지 않는 배우들의 몰입도는 '레드북'의 또 다른 미덕이다. 로렐라이 역의 지현준, 홍우진, 조풍래, 도로시와 바이올렛을 연기하는 한세라, 한보라 등은 극의 유머와 활력을 살리며 이야기의 호흡을 조율하고, 다양한 여성 캐릭터들의 삶과 선택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이들의 존재는 '레드북'이 단지 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닌, 모두의 이야기로 확장되게 만드는 중요한 축이다.
'레드북'이 갖는 시대적 가치는 여전히 유효하다. '레드북'은 여성을 피해자나 조력자로 그리지 않는다. 스스로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는 작가로 묘사한다. 그리고 이 시선은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드물고 귀하다. 안나는 자기 삶을 말하고, 쓰고, 선택하며, 때로는 그 대가를 치르면서도 꿋꿋이 나아간다. 그것은 단지 과거의 여성 서사가 아니라, 오늘날의 모든 개인에게 필요한 서사이기도 하다. 타인의 기대에 맞춰 살기를 거부하고, 자신의 목소리로 삶을 다시 써 내려가려는 모든 사람에게 '레드북'은 새로운 시작점이 된다.
작품은 이미 제3회 한국뮤지컬어워즈에서 작품상, 연출상, 안무상, 여우조연상을, 제6회 시상식에서는 작품상, 연출상, 음악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예술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입증한 바 있다. 공연은 12월 7일까지 유니버설아트센터에서 이어진다.
'레드북'은 감동적인 공연 그 이상이다. 그것은 무대 위에서 다시 써 내려가는 한 사람의 이야기이자,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당신은 당신의 삶을 어떻게 써 내려가고 있나요?" 이 질문 앞에서, 관객은 더 이상 수동적인 구경꾼이 아니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부터, 누군가는 자기만의 '레드북'을 써내려가기 시작할지도 모른다.
뉴스컬처 이준섭 rhees@nc.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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