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의 잎으로 산다는 것은 마치 아무 생각이 없는 사람처럼 사는 것이다. 단 한 번도 나로 살지 않는 것이다. 얼마간 나도 누구의 잎처럼 산 적이 있다. 계절이 바뀌면 모두 내 얼굴을 바라봤다. 혹시 내가 나의 허공을 버리고 어딘가로 날아가지 않았을까 하고. _(18쪽)
가난한 남자와 결혼하고도 읽고 싶으면 철없이, 망설임 없이 책을 샀다. 시를 쓰려고 하면 어디선가 두 가지 이상의 무거운 빵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언제나 시는 다른 중력으로 매일매일 집요하게 접시에 담겨져 있었다. 때로는 빵들의 무게가 시와 같아지거나 더 무거워지려고 해서 무섭고 견디기 어려웠다. _(21쪽)
사랑하는 데는 어떤 기획이나 방법이 별로 필요하지 않다. 사랑한다면 그 사람이 행복을 느낄 시간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야 그 힘으로 또다른 누구를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 자기가 즐거운 시간과 그가 즐거워하는 시간이 다를 때 서로 줄 수 있는 건 ‘최소량의 사랑’뿐이다. 사랑과 관심은 축소된다. _(39쪽)
‘괜찮아’라는 말의 질량이 전복되면 허위와 불행이 된다. ‘괜찮아’는 여유를 느끼게 하는 우아한 말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고통스러운 말이다. _(44쪽)
거목이 거목으로 서 있는 것은 그 힘이 뿌리에 있어서다. 또 무한하게 뿌리의 뻗침을 수용하는 대지가 있어서다. 뿌리는 땅속에 수동적으로 묻혀 있는 존재가 아니라 무섭게 파고드는 존재다. 누구나 지상의 것이 무너지려 할 때 뿌리의 현존을 확인하고 싶어한다. 뿌리를 부르게 된다. _(51쪽)
양들은 하루종일 자기 밥을 질겅질겅 씹어야 밥을 넘길 수 있다. 하얀 것들도 밥 앞에서는 온 힘으로 까맣다. 입을 달고 태어난 자들의 슬픔이 다 그렇듯이. 저 불량한 식사를 위해 양들은 노래할 입이 없다. 하양은 풀에겐 공포스러운 얼음 같은 입이다. 너무 하얀 것들을 나는 믿지 않는다. _(95~96쪽)
사랑과 평화와 아름다움은 위장할수록 숨막힌다. 경건을 위장한 경건도 언젠가는 악취를 내게 된다. 우울한 시대에도, 비록 고통스러운 선택일지라도 본질적인 자기 냄새로 일관하며 진실을 소망하며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용기를 주는 것 같다. _(134쪽)
누구나 변화를 두려워한다. 지금 있는 그대로가 안정되고 편하다. 그러나 변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더 혹독한 고통과 만나야 하고, 변화하고 싶어도 변화할 수 없는 지점에 서 있게 된다. 산 자락에서 본 나무껍질들, 신은 자연을 통해 우리에게 변화의 필요성을 일깨워준다. 세상의 모든 껍질은 쓸쓸하다. _(167쪽)
마음, 자연, 사랑. 이런 것들은 결코 직선이 아니다. 모든 살해 기구와 상처를 주는 위험한 기구들은 직선으로 되어있다. 언어도 마찬가지다. 직설적 언어, 직설적 비난, 직감으로 갖는 오해, 모두 위험한 것들이다. 누군가가 피를 흘린다. _(169쪽)
어느날 노트에 내게 사랑의 빛을 내준 사람의 이름을 적어내려갔더니 노트 앞뒤로 여덟 장을 넘겼는데도 끝도 없이 이어질 것 같았다. 나는 엄청난 빚진 자였다. 그런데 채무자들에게 베픈 작은 것으로 매일 빚 독촉을 하는 나쁜 채무자가 되어 있었다. _(190쪽)
어느 때부터인가 나는 무엇을 인위적으로 어찌하지 않기로 했다. 신은 이미 허약해진 그쪽으로 내가 잡았던 모든 것들을 어느 날 쓰러뜨릴 것이다. _(195쪽)
■ 『사랑은 왜 밖에 서 있을까』
최문자 지음 | 난다 펴냄 | 200쪽 | 1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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