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N] 연극 '프리마 파시'가 우리 사회에 던지는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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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N] 연극 '프리마 파시'가 우리 사회에 던지는 질문

뉴스컬처 2025-09-22 16:38:29 신고

[뉴스컬처 이준섭 기자] 연극이 시작되면, 무대 위에 단 한 사람이 선다. 그리고 말한다. 이건 지는 사건이라고, 법적 직감이 말해준다고. 하지만 동시에, 피해자로서 가장 가까운 경찰서로 향하는 자신을 마주하게 된다. 이 모순의 시작이자 고백은 곧, 연극 '프리마 파시'의 전부다.

법정에서 승소만을 쫓던 유능한 변호사 테사가 하루아침에 성폭행 피해자가 되어 법의 체계와 맞서 싸우는 이야기. 그러나 이 작품은 단지 피해자의 고통을 극적으로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가 그동안 외면하거나, 알면서도 침묵해온 진실을 차분히, 그러나 집요하게 드러낸다.

연극 '프리마 파시'_공연모습_이자람. 사진=㈜쇼노트
연극 '프리마 파시'_공연모습_이자람. 사진=㈜쇼노트

‘프리마 파시(Prima Facie)’는 법률 용어다. 강력한 반증이 없을 경우, 특정 사실이나 주장을 진실로 간주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성폭력 피해자의 증언은 좀처럼 ‘진실’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연극은 이 간극을 정면으로 응시한다. 무엇이 증거로 받아들여지고, 어떤 말은 ‘감정’으로 치부되는지, 그리고 그 이면에 존재하는 법 제도의 구조적 불균형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피해자는 끊임없이 스스로를 입증해야 하고, 과거의 말과 행동은 공격의 빌미가 된다. 그 과정에서 증언은 보호받지 못한 채, 다시 한 번 대상화된다.

'프리마 파시'는 1인극이다. 배우 한 명이 무대를 책임지며 수많은 인물과 감정의 결을 오간다. 연기를 넘어선 체험에 가까운 이 형식은, 단 한 사람의 목소리가 얼마나 많은 사회적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지를 상징처럼 보여준다. 법정 장면에서는 한 인물이 질문하고 답하면서도 동시에 방어하는, 그야말로 ‘자기 자신을 향한 심문’이 펼쳐진다. 조명은 점점 좁아지고, 테사의 목소리는 절박해진다. 우리는 그 빛 안에 선 그녀를 보며, 단지 한 여성이 아니라 지금 이 사회에서 자신의 진실을 증명해야만 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을 본다.

연극 '프리마 파시'_공연모습_김신록. 사진=㈜쇼노트
연극 '프리마 파시'_공연모습_김신록. 사진=㈜쇼노트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분명하다. 성폭력 사건에서 피해자는 단순한 진술자가 아니라, 자신을 입증해야 하는 ‘책임의 주체’가 된다. 법은 중립적이라 말하지만, 현실의 법정은 증언의 무게보다 정황의 해석을 우선시하고, 피해자의 삶을 재단하는 데 익숙하다. 테사는 그 과정을 통과하며 자신이 믿었던 법과 정의의 언어가, 피해자의 입에서는 전혀 다르게 들린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닫는다. 이 깨달음은 곧 연극 전체를 지배하는 정서다. 누가 말하느냐에 따라 진실은 왜곡되고, 증거는 흔들린다. 관객은 더 이상 제3자의 시선으로 극을 바라볼 수 없다. 그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사회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테사는 최후 진술에서 말한다. 성범죄는 일반적인 법적 잣대로 판단할 수 없는 특수한 사건이며, 제도적 변화가 필요하다고. 그것은 단지 자신의 사건을 위한 외침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침묵을 강요당하고 있는, 그리고 말할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을 위한 목소리다. 그리고 그 말은 마침내 그녀 자신에게도 돌아온다. 증언을 끝마친 후 찾아오는 정적 속에서, 관객은 싸움의 끝이 재판의 승패가 아니라, 스스로의 존재를 다시 확인하고 회복하는 과정임을 깨닫게 된다.

연극 '프리마 파시'_공연모습_차지연. 사진=㈜쇼노트
연극 '프리마 파시'_공연모습_차지연. 사진=㈜쇼노트

'프리마 파시'는 문화예술이 사회에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를 묻는다. 단순한 위로나 공감이 아니라, 불편함을 직시하고 변화의 필요성을 제기하는 일. 이 작품은 그 질문을 두 시간 동안 단 한 사람의 목소리로 완수해낸다. 법의 언어로는 포착되지 않는 진실, 말해지지 않았던 경험, 반복되어선 안 될 침묵에 대해. 공연이 끝난 후 극장을 나서는 관객이 무언가를 느꼈다면, 그것이 불편함이든 분노이든, 그것이야말로 이 연극이 존재하는 이유일 것이다.

그녀는 말했다. 법적으로는 이길 수 없는 싸움이라고. 그럼에도 싸워야만 했다고. 이제, 그 증언을 들은 우리는 어떤 답을 할 차례다.

지난달 27일 개막한 연극 '프리마 파시'는 오는 11월 2일까지 충무아트센터 중극장 블랙에서 공연된다.

연극 '프리마 파시'_포스터. 사진=㈜쇼노트
연극 '프리마 파시'_포스터. 사진=㈜쇼노트

 

뉴스컬처 이준섭 rhees@nc.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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