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NEWS=박수남 기자] 인공지능(AI) 반도체 시장의 패권을 둘러싼 경쟁이 격화되면서 시장의 모든 시선은 고대역폭 메모리(HBM)에 쏠려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간의 HBM 기술 경쟁은 연일 헤드라인을 장식하며, 마치 이 경쟁의 승자가 AI 시대의 최종 승자가 될 것처럼 비친다. 그러나 이는 거대한 전쟁의 일부인 전술적 교전에 불과하다. HBM 성능이 AI 가속기의 핵심 요소임은 분명하지만, AI 반도체 패권의 향방을 결정할 진정한 승부처는 메모리 기술 그 자체가 아니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AI 반도체 지배력은 제조 공정의 통합, 공급망 통제력, 그리고 생태계 구축이라는 더 근본적인 차원에서 결정될 것이다.
HBM을 넘어, AI 반도체 전쟁의 재정의
이 거대한 전략적 전환의 중심에 삼성전자의 'IDM 2.0', 즉 '턴키(Turnkey)' 전략이 있다. 이는 삼성전자가 메모리,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첨단 패키징(AVP)이라는 세 개의 핵심 사업부를 모두 보유한 세계 유일의 종합반도체기업(IDM)이라는 독보적 구조를 활용해 AI 시대의 게임 체인저가 되겠다는 야심 찬 승부수다. 이 전략은 단순히 새로운 서비스를 제공하는 차원을 넘어, 순수 파운드리 최강자인 TSMC가 구축해 놓은 반도체 산업의 가치 사슬과 경쟁의 룰 자체를 근본적으로 바꾸려는 시도다. 이는 지난 수년간 파운드리 시장에서 TSMC의 아성을 넘지 못했던 삼성전자가 내놓은 고육지책이자 전략적 선회다. 즉, TSMC의 게임에서 그들을 이기려는 시도를 넘어, 완전히 새로운 게임을 창조하려는 것이다.
삼성전자의 통합 턴키 전략은 전례 없는 시너지와 효율성을 창출하며 AI 시대의 새로운 표준을 제시할 선구적인 움직임인가? 아니면 과거부터 고질적인 문제로 지적되어 온 이해상충 문제와 조직의 경직성을 극복하지 못한 채, 결함 있는 IDM 모델에 모든 것을 거는 위험한 도박에 불과한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향후 10년간 AI 시대에서 삼성전자의 위상과 기업 가치를 결정하게 될 것이다. 턴키 전략의 등장은 역설적으로 삼성전자가 공정 노드와 수율이라는 전통적인 파운드리 경쟁의 잣대로는 TSMC를 따라잡기 어렵다는 현실을 인정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세계 최초로 게이트-올-어라운드(GAA) 기술을 상용화하는 등 기술적 이정표를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파운드리 시장 점유율은 정체되거나 오히려 하락했다. 이는 순수 파운드리로서 고객의 신뢰와 안정적인 수율을 확보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과제인지를 방증한다. 따라서 삼성전자는 경쟁의 차원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TSMC가 갖지 못한 세계 최고 수준의 메모리 기술과 내부 첨단 패키징 역량을 결합하여, 고객의 가치 판단 기준을 '누가 최고의 웨이퍼를 만드는가?'에서 '누가 가장 빠르고 안정적으로 설계부터 최종 패키징된 AI 시스템까지 제공하는가?'로 전환시키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거대한 전략적 전환은 막대한 내부 리스크를 동반한다. 이는 역사적으로 개별적으로 운영되던 메모리, 파운드리, AVP라는 세 개의 거대 사업부가 하나의 유기적인 조직처럼 완벽하게 협력해야만 성공할 수 있는 모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전략의 성공 여부는 삼성전자의 기술력뿐만 아니라, 조직 문화와 내부 운영의 민첩성을 시험하는 거대한 시험대가 될 것이다. 진정한 시너지를 창출하지 못한다면, '원스톱 AI 솔루션'이라는 화려한 구호는 공허한 메아리로 남을 수밖에 없다.
턴키'라는 양날의 검
삼성전자가 제시하는 턴키 전략의 핵심 가치는 AI 칩 생산 과정의 '급진적 단순화'에 있다. 현재 AI 칩을 개발하는 팹리스 기업들은 파운드리(TSMC), 메모리(SK하이닉스), 그리고 후공정(OSAT) 기업들과 각각 개별적으로 계약하고 복잡한 공급망을 관리해야 하는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 삼성전자는 이 모든 과정을 하나의 창구에서, 하나의 계약으로 해결해주는 '원스톱 솔루션'을 제공하겠다는 것이다.
가장 직접적인 이점은 시간과 비용의 절감이다. 삼성전자는 공식적으로 턴키 서비스를 통해 칩 개발부터 최종 생산에 걸리는 전체 시간을 약 20% 단축할 수 있다고 밝히고 있다. 하루가 다르게 기술이 발전하는 AI 시장에서 20%의 시간 단축은 고객사에게 시장 선점의 기회를 제공하는 강력한 유인책이 될 수 있다. 공급망 관리의 복잡성을 해소하는 것 또한 중요한 가치다. 여러 공급업체 간의 조율 과정에서 발생하는 잠재적 병목 현상과 리스크를 단일 공급자인 삼성전자가 모두 흡수함으로써, 고객사는 핵심 역량인 칩 설계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턴키 전략의 궁극적인 잠재력은 단순한 효율성 증대를 넘어선 '기술적 동시 최적화(Co-optimization)'에 있다. 이론적으로 파운드리, 메모리, 패키징 팀의 엔지니어들이 설계 초기 단계부터 긴밀하게 협력한다면, 개별 부품을 단순히 조립하는 수준을 넘어선 최적의 성능과 전력 효율을 달성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특정 파운드리 공정의 특성에 맞춰 HBM의 인터페이스를 미세 조정하거나, 패키징 단계에서의 열 방출 특성을 고려해 로직 칩의 설계를 최적화하는 식의 시너지가 가능하다. 이는 각 분야의 전문 기업들이 분절적으로 협력하는 현재의 방식으로는 구현하기 어려운 차원의 가치다.
이러한 턴키 전략의 가능성은 이미 시장에서 조금씩 입증되고 있다. 일본의 AI 선도 기업 프리퍼드 네트웍스(PFN)가 차세대 2나노 AI 가속기 생산을 위해 삼성전자의 턴키 솔루션을 채택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 계약은 단순한 파운드리 수주를 넘어, 삼성의 2나노 GAA 공정과 I-Cube 첨단 패키징 기술을 통합적으로 활용하는 첫 번째 주요 성과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또한, 애플이 텍사스 오스틴 팹에서 생산되는 이미지 센서 공급망에 삼성전자를 포함시킨 것도 특정 요구에 대해 통합 솔루션이 매력적일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분석된다.
화려한 청사진에도 불구하고, 삼성전자의 턴키 전략은 치명적인 약점을 내포하고 있다. 그 중심에는 '이해상충(Conflict of Interest)'이라는 고질적인 문제가 자리 잡고 있다. 삼성전자 DS부문은 고객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동시에, 시스템 LSI 사업부(엑시노스 등)와 메모리 사업부를 통해 완제품 시장에서 고객과 직접 경쟁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애플, 퀄컴, 엔비디아와 같은 대형 팹리스 기업 입장에서 자신들의 가장 민감한 차세대 칩 설계도를 직접적인 경쟁사와 공유하는 것은 엄청난 부담이자 리스크다. 이것이 바로 TSMC가 "고객과 경쟁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금과옥조로 여기며 신뢰를 쌓아온 핵심 이유이며, 최근 인텔이 파운드리 사업(IFS)을 별도 조직으로 분리 운영하려는 이유이기도 하다.
'모든 것을 잘하지만, 어느 것 하나 최고는 아니다'라는 '어중간함의 리스크' 역시 무시할 수 없다. 삼성전자는 메모리 분야에서는 명실상부한 세계 1위지만, 파운드리에서는 TSMC에 크게 뒤처져 있고, 첨단 패키징 분야에서도 아직 추격자의 입장이다. 고객사 입장에서 세계 최고의 메모리와 2류의 파운드리 및 패키징 서비스를 묶은 턴키 솔루션이 과연 매력적일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복잡성을 감수하더라도 각 분야에서 최고의 기술을 가진 '베스트 오브 브리드(Best-of-Breed)' 조합을 선호할 가능성이 높다.
마지막으로, 거대한 조직 내부의 관성이 턴키 전략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 삼성전자는 최근 DS부문 내에서 조직 개편을 단행하며 사업부 간 시너지 창출과 효율성 증대를 꾀하고 있다. 그러나 수십 년간 독립적으로 운영되며 각자의 손익계산서(P&L)에 따라 움직이던 거대 조직들의 칸막이를 허물고 진정한 의미의 '원팀'으로 만드는 것은 결코 쉬운 과제가 아니다. '원스톱 솔루션'이 실제 운영의 유기적 결합이 아닌, 단순히 세 개의 다른 서비스를 하나의 창구에서 파는 마케팅 구호에 그칠 위험이 상존한다.
이러한 명암을 종합해 볼 때, 삼성전자 턴키 전략의 초기 성공은 특정 고객군을 공략하는 데 달려있다. 애플이나 퀄컴과 같은 직접적인 경쟁 관계에 있는 대형 고객보다는, 두 가지 유형의 고객이 이상적인 타겟이 될 수 있다. 첫째는 PFN과 같은 비경쟁 분야의 AI 스타트업이나 하이퍼스케일러다. 이들은 TSMC의 최첨단 공정 캐파(생산능력) 배정에서 후순위로 밀려나 있는 경우가 많아, 삼성전자의 통합 솔루션이 기술적, 물류적 병목을 동시에 해결해 줄 대안이 될 수 있다. 둘째는 테슬라나 애플(이미지 센서와 같은 비경쟁 제품에 한해)처럼 공급망 안정성과 맞춤형 솔루션을 중요시하는 수직계열화된 기업이다. 이들에게는 삼성전자와의 긴밀한 협력을 통한 최적화가 더 큰 가치를 제공할 수 있다.
궁극적으로 턴키 전략은 삼성전자의 리스크 프로파일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킨다. 기존 파운드리 모델에서 삼성의 책임은 웨이퍼 생산 단계에서 끝났다. 그러나 턴키 모델에서는 최종 패키징된 제품의 수율과 성능까지 모두 책임져야 한다. 이는 패키징 공정의 작은 실패가 파운드리와 메모리 사업부의 명성에까지 타격을 줄 수 있는 '통합된 리스크'를 의미한다. 이는 엄청난 도박이다. 단 한 번의 대형 실패는 전략 전체의 신뢰도를 무너뜨릴 수 있지만, 반대로 성공은 삼성전자의 통합 역량을 시장에 각인시키는 가장 확실한 증거가 될 것이다.
I-Cube는 CoWoS 제국에 맞설 수 있는가
AI 시대의 반도체 경쟁에서 병목 현상이 발생하는 지점은 더 이상 웨이퍼 공정이 아니라, 완성된 칩들을 하나로 묶는 '첨단 패키징'이다. 이 분야의 절대 강자는 TSMC이며, 그들의 'CoWoS(Chip-on-Wafer-on-Substrate)' 기술은 단순한 패키징 기술을 넘어 고성능 AI 가속기의 산업 표준으로 자리 잡았다. 엔비디아의 H100, AMD의 MI300X 등 시장을 지배하는 거의 모든 AI 칩이 CoWoS를 기반으로 제작된다. CoWoS의 핵심은 실리콘으로 만든 얇은 판인 '인터포저(Interposer)' 위에 GPU와 같은 로직 다이와 여러 개의 HBM 스택을 수평으로 나란히 배치하여, 짧고 조밀한 배선으로 연결하는 2.5D 구조다. 이 기술의 성숙도, 검증된 수율, 그리고 방대한 생태계가 바로 TSMC의 핵심 경쟁력이다.
이에 맞서는 삼성전자는 '큐브(Cube)'라는 브랜드로 패키징 기술 포트폴리오를 구축하고 있다.
I-Cube: TSMC CoWoS의 직접적인 경쟁 기술로, 마찬가지로 실리콘 인터포저를 사용하는 2.5D 패키징 솔루션이다. 'I-Cube' 뒤에 붙는 숫자는 통합되는 HBM의 개수를 의미하며, 예를 들어 'I-Cube4'는 4개의 HBM을 탑재한다는 뜻이다.
X-Cube & SAINT: 삼성전자가 차세대 기술로 개발 중인 3D 패키징 기술이다. 이는 칩들을 수평으로 배열하는 것을 넘어, SRAM과 같은 메모리 칩을 로직 칩 위에 수직으로 쌓아 올리는 방식이다. 이를 통해 칩 간의 거리를 극단적으로 줄여 데이터 전송 속도를 높이고 전력 소모를 획기적으로 낮출 수 있다.
공정 방식의 미묘한 차이: 2.5D 패키징 기술은 공정 순서에 따라 '칩-퍼스트(Chip-First, RDL-Last)'와 '칩-라스트(Chip-Last, RDL-First)' 방식으로 나뉜다. 칩-퍼스트는 캐리어 웨이퍼에 먼저 칩을 올리고 몰딩한 후, 그 위에 재배선층(RDL)을 형성하는 방식이다. 공정이 비교적 성숙하고 비용이 저렴하지만, RDL 형성 과정에서 불량이 발생하면 이미 투입된 고가의 정상 칩(KGD, Known Good Die)까지 버려야 하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반면, 칩-라스트는 RDL을 먼저 완벽하게 제작하고 테스트한 후, 그 위에 정상 칩을 정밀하게 올리는 방식이다. KGD 손실 위험이 적어 복잡한 멀티칩 패키징의 수율 확보에 유리하지만, 공정이 더 복잡하고 비용이 높으며 초정밀 칩 배치 기술을 요구한다. 초기 CoWoS는 칩-퍼스트 방식을 주로 사용했으나, 양사 모두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다양한 공정 흐름을 개발하고 있다. 이 미세한 공정 차이가 최종 제품의 수율, 비용, 성능을 결정하는 핵심 변수가 된다.
기술적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삼성전자는 TSMC 대비 두 가지 큰 격차에 직면해 있다. 바로 '생산 능력'과 '수율에 대한 신뢰'다. TSMC는 AI 칩 수요 폭증에 대응하기 위해 CoWoS 생산 능력을 2024년에 두 배로 증설하는 등 공격적인 투자를 이어가고 있다. 반면, 삼성전자의 첨단 패키징 생산 능력은 인텔, TSMC, ASE 그룹에 이어 세계 4위 수준으로, 절대적인 규모에서 열세에 있다. 이는 대규모 물량을 안정적으로 소화해야 하는 빅테크 고객들을 유치하는 데 있어 심각한 병목으로 작용할 수 있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수율'이다. TSMC의 CoWoS 역시 초기에는 수율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 다년간의 양산 경험을 통해 안정화 단계에 접어들었다. 반면, 삼성전자 파운드리는 4나노, 3나노 등 신규 공정 도입 초기마다 낮은 수율로 인해 고객의 신뢰를 잃었던 경험이 있다. 턴키 솔루션은 웨이퍼 수율뿐만 아니라, 훨씬 더 복잡한 패키징 및 테스트 공정까지 포함하는 '최종 완제품 수율'을 보장해야 한다. 이 과정 중 어느 한 곳에서라도 문제가 발생하면 전체 전략의 신뢰성이 무너진다. 삼성전자가 턴키 전략의 성공을 위해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확실하게 증명해야 할 것은 바로 이 '엔드-투-엔드(End-to-End)' 수율의 안정성이다.
포스트-HBM 시대
현재의 HBM-GPU 결합 구조는 AI 아키텍처 진화의 한 단계일 뿐이다. 미래의 AI 반도체는 메모리와 로직이 훨씬 더 긴밀하게, 그리고 새로운 방식으로 통합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미래 기술들은 삼성전자의 턴키 전략과 완벽하게 맞물려 있다.
CXL (Compute Express Link): CPU, GPU, 그리고 다양한 메모리 장치들을 고대역폭으로 자유롭게 연결하는 개방형 표준 인터페이스다. CXL은 서버 시스템 내 메모리 용량을 유연하게 확장하고 공유할 수 있게 해, 효율성을 극대화한다. 삼성전자는 CXL 컨소시엄의 핵심 멤버로서 CXL 기반 D램 모듈 개발에 적극적이다. 턴키 공급자로서 삼성은 자사의 CXL D램을 자사의 로직 공정 및 패키징 기술과 결합하여 최적화된 'CXL 통합 솔루션'을 제공할 수 있다. 이는 여러 공급업체의 부품을 조립해야 하는 경쟁사 대비 상당한 이점이 될 수 있다.
PIM (Processing-in-Memory): 메모리 반도체 내부에 연산 기능을 직접 탑재하여 데이터 이동을 최소화하는 궁극의 통합 기술이다. HBM에 PIM 기술을 적용한 'HBM-PIM'은 AI 추론 및 학습에서 발생하는 데이터 병목 현상을 획기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 이 기술은 메모리와 로직의 설계 단계부터 극도로 긴밀한 협력이 필수적이다. 메모리와 시스템 반도체를 모두 설계하고 생산하는 유일한 기업인 삼성전자는 이 분야를 선도할 가장 유리한 위치에 있다. 그리고 PIM 기술을 상용화하는 가장 자연스러운 경로는 바로 턴키 모델이 될 것이다.
실리콘 포토닉스(Silicon Photonics): 기존의 구리 배선을 통한 전기 신호 대신, 빛(광자)을 이용해 데이터를 전송하는 기술이다. 삼성전자는 2027년까지 패키지 내에 광학 소자를 통합(CPO, Co-Packaged Optics)하는 기술 로드맵을 발표했다. 이는 전기 신호의 물리적 한계를 뛰어넘어 데이터 전송 속도를 비약적으로 높이고 신호 손실을 최소화할 수 있다. 실리콘 로직 칩과 광학 소자를 하나의 패키지에 통합하는 것은 엄청난 기술적 복잡성을 수반하며, 이는 통합 솔루션을 제공할 수 있는 IDM 기업에게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다.
이러한 미래 기술들은 개별 부품의 성능 경쟁을 넘어, 시스템 전체의 아키텍처 혁신을 요구한다. PIM과 같은 기술은 메모리와 로직이 분리되어 설계되는 현재의 방식으로는 상용화가 거의 불가능하다. 메모리, 로직, 패키징을 내부에서 유기적으로 공동 개발하고, 이를 하나의 완성된 제품으로 제공하는 턴키 모델은 이러한 차세대 기술을 시장에 내놓는 가장 현실적이고 강력한 방법이 될 수 있다. 이는 턴키 전략이 단순히 현재의 경쟁 구도를 타개하기 위한 전술이 아니라, 삼성전자의 향후 10년을 관통하는 반도체 비전의 근간임을 시사한다. 이 전략을 통해 삼성전자는 TSMC가 주도하는 개방형 생태계에 맞서, 애플처럼 수직 통합을 통해 최적화된 성능과 단순함을 제공하는 '폐쇄형 생태계(Walled Garden)'를 구축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AI 시대에 시장이 어떤 모델을 선호하게 될지가 향후 패권의 향방을 가를 것이다.
2나노 최전선과 GAA의 이점
삼성전자는 3나노 공정에서 세계 최초로 차세대 트랜지스터 구조인 GAA(Gate-All-Around)를 도입했다. 비록 초기 수율 문제로 고전했지만, 이 경험은 TSMC를 포함한 모든 경쟁사가 2나노에서 GAA로 전환하는 시점에 삼성전자에게 중요한 자산이 될 수 있다. GAA 기술은 기존 핀펫(FinFET) 구조보다 설계가 복잡하고 새로운 노하우를 요구하기 때문에, 팹리스 기업들에게는 상당한 기술적 허들로 작용할 수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턴키 전략이 매력적인 제안이 될 수 있다. 삼성전자는 고객사에게 2나노 GAA 공정으로의 전환을 '손잡고 이끌어주는' 통합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 즉, 검증된 HBM과 최적화된 패키징 솔루션을 2나노 GAA 공정과 함께 묶어 제공함으로써, 고객이 느끼는 기술 전환의 리스크와 진입 장벽을 낮춰주는 것이다. 일본 PFN과의 2나노 턴키 계약은 이러한 가설을 검증하는 첫 번째 시험대가 될 것이다.
나아가 삼성전자는 2027년 양산을 목표로 하는 2나노 공정 'SF2Z'에 BSPDN(후면전력공급) 기술을 적용할 계획이다. 웨이퍼 후면에 전력 공급망을 배치하는 이 혁신적인 기술은 칩의 성능과 전력 효율을 한 단계 더 끌어올릴 수 있지만, 설계 복잡성을 기하급수적으로 증가시킨다. 이처럼 기술이 고도화되고 복잡해질수록, 모든 것을 책임지고 해결해주는 통합 턴키 서비스의 가치는 더욱 커질 수 있다.
데이터 분석
분석은 구체적인 숫자로 뒷받침될 때 비로소 완성된다. AI 반도체 시장을 형성하는 핵심 플레이어들의 재무 건전성과 시장 지위를 비교 분석함으로써, 삼성전자 턴키 전략의 현실적 위치와 잠재력을 가늠할 수 있다. 분석 대상은 통합 도전자 삼성전자, 파운드리 제왕 TSMC, HBM 선두주자 SK하이닉스, 그리고 부활을 꿈꾸는 IDM 인텔이다.
기업의 전략 수행 능력은 결국 재무적 체력에서 나온다. 자기자본이익률(ROE), 영업이익률, 잉여현금흐름(FCF) 등은 각 기업의 수익성, 효율성, 그리고 미래 투자 여력을 보여주는 핵심 지표다.
수익성의 압도적 격차: TSMC의 재무 지표는 경이로운 수준이다. 최근 12개월(TTM) 기준 영업이익률은 46-49%에 달하며, ROE는 30%를 상회한다. 이는 압도적인 기술 리더십과 강력한 가격 결정력을 바탕으로 한 결과이며, 차세대 기술 개발과 생산 능력 확장을 위한 막대한 자금의 원천이 된다. 반면, 삼성전자의 TTM 기준 ROE는 약 8%, 영업이익률은 약 9% 수준으로, 메모리 사업의 호조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수익성이 낮은 파운드리 및 시스템 LSI 사업이 전체 수익성을 제약하고 있다. 턴키 전략은 바로 이 저수익 사업 부문의 부가가치를 높여 전체 수익성을 개선하려는 목적을 담고 있다.
HBM 효과와 투자 부담: SK하이닉스는 HBM 시장 지배력을 바탕으로 최근 분기 영업이익률이 41%에 달하는 등 극적인 실적 개선을 이뤘다. 이는 AI 시대 핵심 부품 시장을 선점하는 것이 얼마나 큰 재무적 이익으로 이어지는지를 명확히 보여준다. 그러나 차세대 HBM4 개발을 위해 TSMC의 패키징 기술에 의존해야 하는 상황은, 통합 생태계의 중요성을 역설적으로 증명한다. 한편, 인텔은 대규모 턴어라운드 투자를 단행하며 TTM 기준 마이너스 영업이익률을 기록하고 있다. 인텔의 미래는 미국 정부의 보조금과 신규 팹의 고객 확보 여부에 달려 있으며, 그들의 '시스템 파운드리' 전략은 삼성의 턴키 모델과 다른 방식으로 TSMC에 도전하고 있다.
AI 반도체 경쟁은 세 개의 다른 전장, 즉 파운드리, HBM, 첨단 패키징에서 동시에 벌어지고 있다. 각 시장의 점유율은 현재의 경쟁 구도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파운드리 시장: TSMC가 약 60%의 압도적인 점유율로 시장을 지배하고 있으며, 삼성전자는 약 11-13%로 2위를 유지하고 있으나 격차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고 있다.
HBM 시장: 2023년 기준 SK하이닉스가 약 53%의 점유율로 1위를 차지했으며, 삼성전자가 약 38%로 그 뒤를 쫓고 있다. 마이크론은 약 9% 수준이다.
첨단 패키징 시장 (생산 능력 기준): 이 분야의 순위는 일반적인 인식과 다소 다르다. 생산 능력 기준으로는 인텔이 1위, TSMC가 2위, 대만의 ASE 그룹이 3위, 그리고 삼성전자가 4위를 차지하고 있다. 이는 인텔이 오래전부터 자체 CPU 생산을 위해 막대한 패키징 설비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TSMC의 강점은 절대적인 생산 능력 규모보다는 AI 칩에 특화된 CoWoS 기술의 지배력에 있다. 삼성전자가 이 분야에서 4위에 머물러 있다는 점은 턴키 전략의 성공을 위해 반드시 극복해야 할 과제임을 보여준다.
이 데이터들은 삼성전자가 처한 복합적인 상황을 드러낸다. 메모리에서는 최강자이지만, 파운드리와 패키징에서는 확실한 추격자다. 턴키 전략은 이 세 개의 조각을 하나로 꿰어, 개별 시장에서의 약점을 상쇄하고 통합된 힘으로 새로운 경쟁 우위를 창출하려는 시도인 것이다.
'장밋빛 가시밭길'
삼성전자의 턴키 전략은 현재의 경쟁 구도 속에서 내릴 수 있는 가장 논리적이고 대담한 선택이다. 이는 자사가 보유한 모든 고유 자산을 총동원하는 유일한 길이다. 그러나 그 길은 엄청난 잠재력이라는 '장미'와 혹독한 실행의 '가시'가 공존하는 '장밋빛 가시밭길'이다. 전략의 성공은 결코 보장되어 있지 않으며, 거의 완벽에 가까운 실행력에 달려있다.
시나리오 분석
Bull Case (시너지 전략 성공 시나리오): 삼성전자가 2나노 GAA 공정에서 경쟁력 있는 수율을 달성하고, I-Cube 패키징의 대량 양산 안정성을 입증하는 데 성공한다. 이를 바탕으로 AMD나 엔비디아의 차세대 제품 일부, 혹은 주요 하이퍼스케일러의 자체 개발 칩과 같은 최상위 고객사의 대규모 턴키 수주에 성공한다. 이는 턴키 모델의 가치를 시장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신호탄이 되며, 고성능 AI 칩 시장에서 TSMC의 독점적 지위에 균열을 낸다. 통합 솔루션이 분절된 '베스트 오브 브리드' 조합을 능가할 수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 시나리오가 현실화될 경우, 시장은 삼성전자의 가치를 재평가(Re-rating)하게 될 것이다. DS부문은 더 이상 개별 사업부의 합이 아닌, 시너지를 창출하는 단일 AI 솔루션 기업으로 평가받게 되며, TSMC에 근접하는 높은 밸류에이션 배수(multiple)를 적용받을 타당성이 생긴다.
Bear Case (IDM의 덫 시나리오): 2나노 및 3나노 파운드리와 I-Cube 패키징 라인에서 고질적인 수율 문제가 지속된다. 시스템 LSI 사업부와의 이해상충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주요 고객사 유치에 실패한다. 턴키 서비스는 PFN과 같은 일부 틈새 시장 고객을 확보하는 데 그치며 주류로 부상하지 못한다. 삼성전자는 수십조 원의 막대한 설비투자(Capex)를 집행하고도 TSMC와의 시장 점유율 격차를 좁히지 못하고, 그 과정에서 압도적 1위인 메모리 사업에 대한 집중력마저 분산되는 최악의 상황에 직면한다.
전략의 실패는 삼성전자가 파운드리 시장에서 '영원한 2위'로 고착되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주식 시장은 삼성전자를 여전히 경기 변동에 민감한 메모리 기업으로만 평가할 것이며, 파운드리 사업은 저마진과 막대한 투자 부담을 안기는 '계륵'으로 취급받을 것이다. IDM 구조에 대한 시장의 불신, 즉 'IDM 할인(discount)'은 더욱 심화될 것이다.
투자자들은 이제 단기적인 HBM 시장 점유율 변화라는 지엽적인 지표에서 벗어나, 삼성전자 턴키 전략의 성패를 가늠할 핵심 성과 지표(KPI)를 추적해야 한다. 앞으로 주목해야 할 가장 중요한 변수는 다음과 같다. 첫째, 2나노 GAA 공정의 수율 및 성능 데이터. 둘째, PFN을 넘어서는 새로운 대규모 턴키 고객 확보 여부. 셋째, 메모리, 파운드리, AVP 사업부 간의 실질적인 운영 및 재무적 시너지 창출 증거. 다음 HBM 제품의 사양이 아니라, 이 거대한 전략적 실험의 성공 여부가 향후 10년간 삼성전자의 기업 가치를 결정할 진정한 변수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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