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컬처 이준섭 기자] 세상에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감정들이 있다. 그리고 그 감정을 배우는 데 평생이 걸릴 수도 있다. 창작 뮤지컬 '아몬드’는 그런 감정을 잃은 한 소년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잊고 있던 ‘공감’이라는 단어를 조용하지만 깊게 되새긴다.
2022년 초연 당시 ‘문학과 무대의 이상적인 결합’이라는 평을 받은 '아몬드'는 3년 만에 무대, 음악, 대본, 연출 전반을 재정비하며 보다 정제된 형태로 돌아왔다. 손원평 작가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작품은, 한국 창작 뮤지컬의 또 다른 가능성을 입증하며 다시 한 번 관객을 무대 앞으로 불러세운다.
작품 전반에 흐르는 주제는 결국 ‘공감’이다. 알렉시티미아라는 신경학적 장애로 인해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소년 윤재는, 곤이와 도라를 만나며 점차 ‘감정’이라는 세계를 배우고, 타인과 연결되는 법을 익혀간다. 극은 감정 표현이 미숙하거나 관계에 서툰 현대인에게 ‘공감은 배울 수 있는 감정’이라는 메시지를 조용히 던진다. 윤재의 변화는 빠르지도, 극적이지도 않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설득력 있고 깊다. 윤재를 지켜보는 관객은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그 느린 변화에 마음을 움직이고, 감정을 닮아간다.
원작이 보여준 서사적 진정성을 무대 위에 풀어내는 과정은 섬세하다. 극은 한순간의 각성이나 감정의 폭발이 아니라, 감정을 배워가는 느린 시간을 선택한다. 무대는 그 서사를 따라, 조심스럽고 절제된 방식으로 윤재의 세계를 펼쳐 보인다.
이번 시즌은 특히 시각적 확장과 서사의 응축을 동시에 이루며 ‘업그레이드’라는 표현이 무색하지 않은 성장을 보여준다. LED 영상의 도입은 정서적 장면 전환과 인물의 내면 상태를 보다 풍부하게 전달하며, 극의 시공간적 한계를 극복한다. 시각적 요소가 단순한 배경의 역할을 넘어 정서적 장치로 기능함으로써, 무대 전체가 하나의 심리 구조물처럼 작동한다. 이와 함께 캐스트의 규모를 8인으로 축소하고, 윤재 역을 제외한 모든 배우들이 복수의 인물을 연기하는 구조는 극의 밀도를 높이고 인물 간의 긴밀한 연결을 가능케 했다.
음악은 여전히 이 작품의 핵심이다. 이성준 작곡가는 ‘프랑켄슈타인’, ‘벤허’ 등에서 보여준 감정 중심의 음악적 세계를 이번에도 고스란히 펼쳐낸다. 그의 선율은 인물의 말보다 먼저 감정을 전달하며, 말로 표현되지 않는 순간들에 대한 해석을 관객에게 맡긴다. 음악은 극의 장면 전환을 이끄는 장치이자, 인물의 심리적 진폭을 확장하는 장치로 기능한다. 여기에 김태형 연출과 서휘원 극작이 만들어낸 구조는 감정의 흐름을 끊김 없이 이어가며, 관객이 어느 순간부터는 윤재의 무표정 안에서 일렁이는 감정을 감지하게 만든다.
관계 중심의 서사를 다루는 만큼 캐릭터 페어링은 이번 시즌의 가장 흥미로운 구성 중 하나다. 윤재와 곤이를 연기하는 세 페어는 각각의 결을 지닌 관계성을 보여준다. 윤소호와 김건우는 충돌과 긴장의 축 위에서, 김리현과 윤승우는 감정을 깨우는 실험적 관계를 중심으로, 문태유와 조환지는 서서히 관계를 쌓아올리는 서정적인 정서를 품는다. 하나의 이야기 속에서 세 가지 관계의 패턴이 존재하는 이 구조는 반복 관람의 서사를 만든다. 관객은 세 페어의 차이를 통해 같은 이야기 속 다른 감정의 파형을 경험하게 된다.
뮤지컬 ‘아몬드’는 소설이 말하던 메시지를 무대 언어로 치환하는 데 성공한 작품이다. 극은 결코 감정의 절정을 강요하지 않는다. 오히려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는 소년을 통해, 감정을 과하게 드러내는 시대가 잊고 있던 ‘이해’의 방식을 조용히 환기시킨다. 윤재가 감정을 배워가는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관객은 어느새 자신 역시 누군가의 감정을 오해하거나 단정했던 순간을 떠올리게 된다. 이 작품은 바로 그 지점에서, 단지 한 인물의 성장기를 넘어 관객 각자의 성찰을 유도하는 극으로 확장된다.
12월 14일까지 서울 NOL 유니플렉스 1관에서 공연되는 이번 시즌은, 뮤지컬이라는 장르가 감정의 깊이를 얼마나 섬세하게 구현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증거다. 문학과 무대의 경계가 자연스럽게 녹아든 이 작품은, 공연이 끝난 뒤에도 오랫동안 마음속에 잔상을 남긴다. 감정은 언제나 쉽지 않다. 하지만 이 뮤지컬은 말한다. 감정은, 때로는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배우는 것’이라고.
뉴스컬처 이준섭 rhees@nc.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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