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차피 멀쩡한 몸에도 한 마디씩 얹잖아?” 연극 ‘마른 여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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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멀쩡한 몸에도 한 마디씩 얹잖아?” 연극 ‘마른 여자들’

독서신문 2025-09-17 10:45:00 신고

다이애나 클라크의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각색한 연극 '마른 여자들'. [사진=두산아트센터]

“날 따라 해봐라 요렇게-” 쌍둥이 자매 로즈(이세영 배우)와 릴리(황미영 배우)가 천진하게 부르는 노래로 무대가 열린다. 언뜻 어린 시절의 놀이로만 치부될 수 있지만, 이 ‘따라하기’는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섭식장애 서사의 씨앗이 된다. 다이애나 클라크의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연극 ‘마른 여자들’은 먹기를 거부하는 마른 여자들 이야기를 다루면서, 그것을 한 개인의 자기 파괴로 환원하거나 단순히 사회의 탓으로 돌리지 않고, 관계들 속에서 어떻게 마른 신체에 대한 선망과 동경이 만들어져 가는지, 개인들은 그 안에서 어떻게 상호작용하고 자신의 몸과 어떻게, 왜 반목하게 되는지를 보여준다.

원작은 “언제나 나는 거식증(anorexia)을 공룡이라고 생각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프로아나’와 ‘뼈말라’같은 단어들이 회자되고, 특히 십대 여성 청소년들 사이의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될 때도 많은 사람들은 ‘그들’을 쉽게 타자화했다. 왜 그렇게까지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마르고 싶은 욕구는 낯선 것이 아니었다. 연극을 관람하며 마른 몸은 스펙트럼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마른 여자들은 어쩌면 우리 모두라는 감각이다.

여성들의 ‘마른 몸’은 자발적 선택처럼 보일 때가 많지만, 그 선택들은 복잡한 관계의 역학이 작용한 결과다. 또래 집단의, 그리고 말할 것도 없이 미디어에서 떠들어대는 무수한 말들은 여자들의 규율을 만든다. 예컨대 로즈의 다이어트가 인기 있는 여자아이인 제나(김유민 배우)의 제안, 그들의 아이돌 “캣 미첼스처럼 되자”라는 말에서 시작되었을지 몰라도, 그보다 오래된 모르는 남자아이의 “뚱뚱하다”라는 한마디가 그러한 선택에 영향을 줬을 수 있다. 미디어와 또래 집단은 끊임없이 여자아이들이 가야 할 곳을 주입한다. ‘마른 몸’이라는 이상의 세계다. 극에서 지나가듯 툭 던져지는 “어차피 사람들은 멀쩡한 몸에도 한 마디씩 얹잖아?”라는 대사는 관객에게도 몸에 대한 자신의 언어와 시선을 돌아보게끔 한다.
 

박주영 연출가는 연출 노트에서 "섭식장애를 가진 사람들에게서 본 것은 자기 파괴가 아니라 자기 증명"이라고 말했다. [사진=두산아트센터]

없어 없어 우린 없어 — 부재를 연습하는 여자들

무대는 곧 시설로 전환된다. 마른 여자들은 ‘음식과 악수하기 연습’과 “내면의 평화를 지켜”라는 주문을 반복하지만, 그 연습의 바깥에서 더 활발히 이루어지는 것은 들키지 않고 섭식하지 않는 법을 나누는 일이다. “없어 없어 우린 없어”라는 대사는 현실 부정이자, 이 세상에서 스스로를 “0의 상태”로 만들고 싶은 마음의 주문처럼 들린다. “먹지 않는 방법, 사라지는 방법, 천천히 죽어가는 방법”은 마른 여자들 사이에서 은밀한 연대의 코드가 된다. 슬로모션으로 연출된 ‘음식과 친해지기’ 세션에서 우유 한 잔의 칼로리까지 계산하며 “액체는 더 빨리 흡수된다” 읊조리는 로즈. 이러한 강박은 음식을 먹지 않는 것으로, 먹은 음식을 도로 토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박주영 연출가는 연출 노트에서 반려묘를 떠나보낸 뒤 3개월 동안 “먹고 토하기를 반복”했던 경험을 소환한다. 그는 “섭식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종종 ‘자기 파괴적’이라는 말로 규정되지만, 내가 본 것은 자기 파괴가 아니라 자기 증명”이라고 적었다. “이 작품을 쓰면서 나는 이해하기 어려운 여자들을 이해해 보고 싶었다. 왜 저렇게까지 할까? 왜 자신을 망가뜨리면서도 멈추지 못할까?” 김서휘 조연출은 연습 첫날부터 배우와 창작진에게 “절대로 마르지 마시오”라는 원칙을 전달했다. 건강한 몸이 건강한 무대를 만든다는 믿음, 그리고 이 공연이 단지 ‘마른 몸’을 소재로 하는 것이 아니라, 몸에 대한 욕망과 압박 속에서 해방하고자 하는 이야기임을 분명히 했다.

무대의 원형 구조와 쌍둥이가 혀로 느끼는 서로의 ‘맛’들은 텔레파시이자 고통의 공명이다. 로즈의 피로한 눈빛과 위태롭게 흔들리는 몸, 마르지 않은 몸으로도 마른 여자들을 연기하는 배우들은 그 인물을 실제로 살아낸다는 착각을 일으킨다. 단순히 몸의 형태를 재현하는 게 아니라 인물의 내면과 감정, 서사에 몰입하고 인물 간 관계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작품은 오히려 입체적이고 강렬해졌다. 유일한 남배우인 김승환은 건너편 남자시설 수용자의 마른 몸까지 일인 다역으로 연기하며 작품의 관계망을 확장한다.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로런 역의 김별 배우, 로즈 역의 이세영 배우, 릴리 역의 황미영 배우, 그리고 제나 역의 김유민 배우. [사진=두산아트센터]
여자아이들이 선망하는 '캣 미첼스' 역의 임윤진 배우. [사진=두산아트센터]

사과 한 알과 프로아나, 그리고 ‘욕구들’

사과 한 알 다이어트는 캐럴라인 냅의 거식증 경험을 담은 책 『욕구들』을 떠올리게 한다. 르누아르의 작품 속 풍만한 여성들의 몸을 보고 “뚱뚱하다”며 경멸하듯 고개를 돌렸을 것이라는 회고, 여름에도 추위를 타고 굶기에 몰입했던 그 시절의 기록은 연극 속 로즈와 릴리, 그리고 마른 여자들의 몸짓과 눈빛과 겹쳐 보인다.

원작에서는 제미마와 다른 아이들의 다이어트가 이틀로 끝나지만, 극에서는 다른 여자아이들도 계속 다이어트를 이어간다. (릴리는 다이어트를 하지 않지만, 어떤 남자를 만나느냐에 따라 흡연 습관을 가지거나 식이를 조절하는 등 다이어트에 관심을 가지는 모습을 보인다.) 로런(김별 배우)이 제나에게 “너 뚱뚱해!”라는 금기어를 던지는 장면은 한마디의 언어가 신체 이미지를 어떻게 뒤틀어놓는지를 극적으로 보여준다.

강이현의 시 「뛰는 날」에는 체조 선생님이 “사람들이 말랐다고 하는데 사실은 배가 나와 있잖아요”라고 말하는 구절이 있다. '마른' 사람들조차 또 다른 기준 속에서 평가받는 현실. 연극 속 아이들이 “내면의 평화를 지켜”라고 주문처럼 중얼거리면서도 칼로리를 계산하고, “없어 없어 우린 없어”라고 반복하는 모습은 이 시구가 보여주는 현실과 겹친다. 우리는 성장 과정에서 이런 언어를 수없이 듣고, 그것이 몸에 대한 왜곡된 가치관을 만든다. 몸매 한 곳 한 곳을 뜯어보며 부위별로 평가받는 우리의 몸은 언제나 공개적이다. 원하든 원치 않든 어디에나 함께한다.

자신의 몸과 반목하던 ‘마른 여자들’은 그러나 극의 끝에서 희망을 보여준다. 부정과 부재의 언어에서 벗어나 이제는 다른 몸짓을 모색하기 시작한다. 건강한 언어를 다시 배우기가 여전히 가능하다는 감각이다.

연극 ‘마른 여자들’은 오는 28일까지 두산아트센터에서 공연된다.

[독서신문 이자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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