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레니엄이 당도한 2000년 안팎 가수 휘성과 보컬 트레이너 전봉진이 듀엣한 스티비 원더 '레이틀리(lately)' 영상은 노래 좀 부른다는 가수 지망생들 사이에서 단연 화제였다.
뉴시스 보도에 따르면, 광주광역시에 살던 가수 이현(42)도 해당 영상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휘성을 좋아하던 그는 이왕 서울에 가기로 결심한 만큼, 전봉진에게 노래를 배워보자는 결단도 내렸다.
이현이 2000년대 초반 왕성하게 활동한 흑인 음악 동아리 '소울리스트'에 몸담았던 이유다. 이곳엔 가수 케이윌, 보컬그룹 'SG워너비' 김진호 등 전봉진을 사사한, 내로라하는 R&B 가창 실력을 지닌 이들이 거쳐갔다.
최근 이태원에서 만난 이현은 미국 컨템퍼러리 R&B 보컬 그룹 '보이스투맨'을 굉장히 좋아했었다고 신나했다. "보이스투맨의 음악을 들으면서 흑인음악에 빠져들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현이 흑인 음악을 좋아하게 된 원류엔 1세대 K-팝 걸그룹 'S.E.S.' 유진이 있다. 미국 R&B 가수 토니 브랙스턴이 유진이 제일 좋아하는 가수라고 해서 찾아들었는데, 신세계를 경험하게 된 것이다.
사실 방시혁 하이브 의장이 하이브 전신이던 빅히트 엔터테인먼트를 이끌던 초창기, 이 레이블은 흑인 음악과 긴밀했다. 글로벌 슈퍼 그룹 '방탄소년단'(BTS)도 데뷔 초창기엔 정통 힙합 보이그룹을 표방했다.
'빅히트 뮤직'의 1호 가수 이현이 16일 오후 6시 발매하는 미니 3집 '앤드(A(E)ND)'가 그래서 반갑다. 앨범으로 따지면, 2012년 1월 발매한 정규 1집 '더 힐링 에코(The Healing Echo)' 이후 13년8개월 만이다. 이현이 초창기 좋아했던 음악에 대한 향수가 넘친다.
타이틀곡은 '이쯤에서 널'은 브리티시 록(British rock)에 기반한 팝 발라드(Pop ballad)다. 더 주목할 만한 트랙은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에 각각 자리한 '데이 & 드림(Day & Dream)', '왓츠 온 유어 마인드(What’s On Your Mind)', '우리의 중력'(feat. 프로미스나인 송하영)이다.
이현의 중저음이 돋보이는 '데이 & 드림'은 2000년대 초 유행한 네오 솔 장르를 현대적으로 R&B 솔이다. '왓츠 온 유어 마인드' 역시 2000년대 초반을 풍미한 음악에 대한 향수를 느낄 수 있는 곡으로, 그 시절 미국에서 유행한 R&B 팝을 미디엄 템포 R&B로 재해석했다. '우리의 중력'은 2000년대 초중반 미국에서 유행한 R&B 감성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R&B 팝이다.
빅히트 뮤직의 대표 프로듀서로 K-팝에 특화된 것으로 알려졌으나 힙합, R&B에도 일가견이 있는 피독(Pdogg)이 이번 앨범 여러 수록곡의 프로듀싱, 작곡, 작사를 맡아 힘을 보탰다.
"요즘 유행하는 밴드 음악은 원래부터 저도 관심이 있었지만, 저까지 꼭 해야 하나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오랜만에 나온 앨범인 만큼 제 정체성을 잡아두고 가고 싶기도 했고요. 그렇게 고민을 하다가 2000년대 초반 R&B 솔에 대한 재해석이 떠올랐죠. 1번부터 3번 트랙까지는 약간 비트감이 있고 밝은 노래들이에요. 그간 한 번쯤은 해봤을 법도 한데 '왜 내가 이런 걸 한 번도 안 했지'라는 의구심이 들 정도로, 제가 잘할 수 있는 그리고 연습생 때 많이 했던 노래들이죠. 그리고 이런 스타일은 피독이 제일 잘해요. 그래서 독이랑 해보게 된 거죠."
올해 19년차 가수인 이현은 2007년 8월 혼성그룹 '에이트(8eight)' 정규 1집 '더 퍼스트(The First)'로 데뷔했다. 그런데 그 만큼 국내 음악계에서 다양한 활동으로, 여러 정체성을 가진 인물도 드물다. 에이트를 알린 오디션 프로그램 '쇼바이벌'을 거쳤고, 빅히트가 매니지먼트를 맡았던 보컬그룹 '2AM' 이창민과 함께 남성 듀오 '옴므'로 활동하기도 했다. 거기에 솔로 활동을 거쳐 재작년엔 하이브의 음악과 기술을 접목한 야심찬 프로젝트의 산물인 가수 미드낫(MIDNATT)으로서 첫 디지털 싱글 '마스커레이드(Masquerade)'를 발매했다. 이런 방사형의 활동은 다재다능함을 증명하는 측면도 있지만, 이현 스스로는 정체성에 대한 고민도 생길 법하다.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안 해본 건 아니에요. 그런데 제 몇 안 되는 장점 중 하나가 어느 순간 어디에 놓여지든 제 툴(tool)을 굉장히 잘 알고 있다는 겁니다. 그 가운데 제가 가야 할 큰 방향성을 놓치지 않는 게 가장 큰 장점이죠. 제 전체적인 큰 방향은 '오랫동안 노래하고 싶고, 오랫동안 무대에 서고 싶은 것'이에요. 그 안에서 제게 주어진 기회들을, 제 툴 안에서, 최대한 노력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모든 선택들이 오롯이 제 완벽한 의견으로 선택된 것들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 순간에 제가 어느 정도 선택을 했고 그 안에서 '난 이런 것들을 할 수 있구나'하면서 배운 것들이 굉장히 많아요. 특히 못하는 줄 알았는데 할 수 있었던 게 있었고, 잘할 거 같았는데 '못하네' 한 것도 있었죠."
이현은 사실 처음 솔로곡을 냈을 때 굉장히 잘할 거라고 생각했다고 웃었다. 하지만 "노래를 전체적으로 운영하는 능력이 아직 버거웠던 나이 대였던 것 같았다"고 겸손하게 돌아봤다.
"물론 그 당시에서는 최선이었지만 지금 와서 보면은 에이트로 시작을 해서 그런지 (혼자서) 채워내지 못했던 것들이 있었어요. '솔로 활동을 제대로 하려면 좀 채워봐야겠구나'고 느끼기도 했죠. 에이트 활동에선 제가 '감정의 극한'만 보여주면 됐었거든요."
못할 줄 알았는데 하게 된 영역은 '신나는 노래'다. "노래를 계속 하다 보니 '이런 재미들이 있네' '내가 이런 복고도 할 수 있네'라는 순간도 맞이하게 돼 굉장히 운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현이 성장해나가는 가운데, 빅히트 엔터테인먼트는 K-팝 최대 기획사 하이브가 됐다. 인기 K-팝 아이돌 그룹이 가득한 하이브 뮤직 그룹에서 이현은 조바심이 나거나 혼란스럽지 않았을까. 그러나 이현은 혼란스럽기는커녕 마음이 더 편해진 게 있다고 털어놨다.
"하이브는 이제 아이돌을 위해서 최적화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고, 저는 제 나름대로 회사 안에서 제가 도움을 받은 프로듀서들이랑 할 수 있는 영역 안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면 되기 때문이죠. 예전엔 '내가 진짜 열심히 해서 좋은 성과를 내야 우리 회사가 더 잘 된다'는 책임감이 많이 있었는데, 지금은 후배들이 워낙 잘해주니까요."
여기에 회사가 세세하게 들여다보기 힘든 프로듀서, 아티스트의 고충을 파악해 사내에 전달하는 것도 이현이 하는 중요한 몫이다.
이렇게 생긴 삶의 여유는 자연스럽게 음악에도 묻어난다. 이번 앨범 타이틀곡 '이쯤에서 널'에선 이전보다 절제된 창법이 느껴진다. 예전처럼 울부짖는 건 지금의 트렌드와 어울리지 않다고 이현은 판단했다. 복합적인 감정들을 담은 곡인 만큼, 창법적인 것보다 표현에 신경을 썼다는 전언이다. 음을 일부러 좀 더 많이 흔들었고, 완벽하지 않더라도 감정 표현이 자연스럽게 됐으면 넘어갔다.
옛날 같았으면 '널 책임지기 위해 끝까지 갈게'라고 절규했겠지만, 지금은 그것이 꼭 정답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또 삶이 팍팍한 탓에 새로운 발라드를 듣지 않는 시대에, 자신이 즐거웠던 시절에 들은 음악들을 연상케 하는 노래들을 부른다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특기했다.
앨범명 '앤드(A(E)ND)'는 '그리고'이자 '끝'으로 읽힌다. 그런데 이건 한 번의 선항적인 삶이 아닌 반복의 순환이다. 이현도 "제 스스로부터 시작을 하는 것 같아요. 오랜 공백 기간이 있었고, 다 털어낼 수는 없지만 제 안에 부침도 있었고, 또 용기 내보는 순간도 있었는데요. 이번 앨범에서도 '끝인 거 같았지만 다시 시작하는 메시지'를 노래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확실한 정답이 생기지 않는 게 인생이다. 다만 이현은 자신만의 해답을 찾았다.
"물이 들어왔을 때 노를 저을 게 아니라, 계속 노를 저어야죠. 그러다 보면 물이 들어올 때도 있고 빠질 때도 있는 거니까요. 지금 시기 안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최선 그리고 꾸준함을 계속 가져가다 보면, 또 앞으로 나아갈 수도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래서 버티는 게 중요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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