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베스트 셀러에 생각이 미친 것은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다. 매스컴이 전하는 최근 우리 기업들의 처지와 나라 경제의 현주소가 책 제목에 딱 어울린다는 느낌 때문이다. 지난 4일 열린 ‘기업성장포럼’ 출범식. 기조연설 마이크를 잡은 최태원 대한상의 회장은 준비한 대형 패널 3개 옆에 서서 기업들을 옥죄는 규제의 현실을 낱낱이 보여줬다. 자산 규모 5000억원 미만의 중소기업일 때는 아무 규제도 받지 않지만 자산 규모가 11조 6000억원을 넘어가면 모두 343개의 규제와 맞닥뜨린다고 그는 지적했다. 덩치가 커지면 기하급수적으로 규제가 늘어난다며 계단식 규제를 놔두고는 기업 성장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게 골자였다. 하지만 필자가 더 주목한 것은 민간 기업들이 경제 성장에 기여한 비율이었다. 최 회장은 이 비율이 30년 전 8.8%포인트에서 이제는 1.5%포인트로 급락했다고 말했다. 경제 성장의 엔진으로 대접받으며 언제까지나 나라 먹거리 해결의 ‘끝판왕’이 돼줄 것으로 믿었던 기업들의 역할과 존재감이 급속히 오그라들고 있음을 알린 증거였다. 세계 시장을 누비며 한국 경제의 버팀목이 돼왔던 기업들이 이대로라면 ‘그 많던 싱아’처럼 될 수 있음을 일깨워 준 대목이기도 했다.
기업들이 나라 안팎에서 겪는 고초와 푸대접은 새삼스런 소식이 아니다. “대미 관세 협상 타결에 큰 도움을 줬다”며 이재명 대통령이 감사를 전했지만 여당은 수많은 기업과 경제단체가 결사반대한 노란봉투법과 상법 개정을 기어코 밀어붙였다. 이재명 대통령이 취임 후 한국노총·민주노총 위원장과 처음 만난 자리에서는 이 대통령의 ‘노사정’ 대화 요구에 ‘노정교섭 선행’ 주장(민주노총)까지 나왔다. 노정교섭을 통해 노정간 신뢰를 회복하는 게 선행돼야 한다는 것이지만 핵심은 기업 빼고 정부와 노조만 얘기하자는 것이다. 근로 계약의 당사자인 기업을 젖혀 놓고 심판격인 정부와만 대화하겠다는 것이니 기업들로선 기가 막힐 노릇이다. 65세 정년 연장, 주 4·5일제 시행 등 노동계의 청구서가 잇따를 게 분명한 상황에서 과속 질주가 어디까지 이어질지 걱정스럽다.
규제와 압박, 징벌적 제재 등이 기업들을 겨냥한 상시적 국내 위협이라면 4일 미국 조지아주에서 벌어진 한인 근로자 대거 체포는 거대한 외풍이다. 정부 간 교섭으로 근로자들이 석방돼 오늘 귀국하지만 묵인해 왔던 여행 비자 관행 대신 미국이 취업 비자를 내세워 불법 체류의 회초리를 들이댄 것을 일회성 해프닝으로 넘길 수 있을까. 경제, 통상 외교의 궂은 일을 마다않았던 우리 기업들로선 바짝 긴장하지 않을 수 없다. 천문학적 자금을 쏟아야 할 대미 투자에서 ‘봉’ 노릇만 할지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현실화할까 두렵다. 여기저기서 맞고만 다니는 동네북 신세가 따로 없다.
전체 파이를 키우기보다 눈앞의 이익 분배에 집착하면서 격려와 칭찬보다 분노와 함성으로 기업을 몰아세우는 곳에서 초일류기업 탄생이 가능할까.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신산업 부재와 지지부진한 노동생산성을 우리 경제 실력 저하의 원인으로 짚었지만 기업들이 지금까지 버틴 것만도 다행이다. 기업과 기업인을 적대시하고 윽박지를 대상으로 보는 우리 사회 일각의 낡은 사고와 시각을 바꿀 수 있는 시간은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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