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한 줄 평
“경계가 허물어지는 곳에서 떨고 있는 것들을 데려와서는 같이 떨고 있다.”
▲시 한 편
<새벽 편지> - 김보일
펜을 잉크에 찍는다는 게 그만
무심코 유리컵 속에 찍었다
물 속으로 사라져가는 푸른 빛
저 창백한 빛을 건져
펜촉을 눌러 남은 편지를 쓴다면
물 속으로 나른하게 번지던 문장
그 끝을 당신은 한 글자 한 글자 읽어낼 것이다
▲시평
새벽에 일어난 시인은 당신에게 편지를 쓴다. 지금은 거의 사용하지 않는 펜으로 잉크를 찍어 “한 글자 한 글자” 정성스레 쓰고 있다. 글씨를 쓰는 속도에 따라 잉크가 다른 농도로 번진다. 빠른 곳은 가늘게 느린 곳은 굵게 농묵(濃墨)과 담묵(淡墨) 사이를 오간다. 반복해서 잉크를 찍어대던 손길이 “무심코” 옆에 놓여있던 유리컵에 펜을 찍는다. 실수를 깨달을 사이도 없이 물에 번지는 푸른 잉크를 가만히 보고 있다. 점점 옅어지며 둥글게 퍼져나간다. 소리 없이 번지는 잉크의 빛깔은 창백하다. 단순히 푸른색이어서 창백한 것일까. 물에 번지는 푸른빛의 ‘창백함’은 유리컵에 담긴 물의 용도를 생각하게 한다. 그 물은 약을 먹기 위한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과 함께 복용한 약이 몸속에서 녹아 스미듯, 물에서 번져가는 잉크의 이미지가 일순 겹친다. 내 몸이 유리컵이라면, 약은 푸른 잉크다. 내 몸속으로 들어온 약이 나를 떨리게 하듯, 유리컵 속의 잉크도 컵을 미세하게 흔든다. 떨림과 흔들림 사이에 농담(濃淡)이 틈입한다. 내 몸이 농이라면 유리컵은 담이다. 지금까지 쓴 편지가 농이라면 이후에 쓰는 편지는 담이다. “무심코” 농담처럼 던진 말 때문에 사과의 편지를 쓰는 것인지도 모른다. 새벽은 가장 정신이 맑은 시간이다. 감성보다 이성이 지배하는 시간에 정신을 집중해 쓴 편지에 농담이 들어있다. 농담의 스밈과 번짐 사이에는 ‘빛’이 존재한다. “푸른”과 “창백한”이 의미하듯, 긍정의 빛은 아니다. 한데 병색이 완연한 빛이 유리컵에서 펜으로 옮겨진다고 생각하자 한 폭의 수묵담채 같은 시적 분위기가 생겨난다. “그 끝”은 편지를 거의 다 썼다는 말이다. “물 속에서 나른하게 번지던 문장”이 편지지에 번지고, 다시 그 편지를 읽는 당신에게 스며든다. 당신의 손이 미세하게 떨린다. (김정수 시인)
▲김정수 시인은…
1990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했다. 시집 『사과의 잠』 『홀연, 선잠』 『하늘로 가는 혀』 『서랍 속의 사막』과 평론집 『연민의 시학』을 냈다. 경희문학상과 사이펀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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