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광의 이집트 칼럼 #3] 파피루스② 이어지는 손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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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광의 이집트 칼럼 #3] 파피루스② 이어지는 손길

문화매거진 2025-09-09 17:25:34 신고

[한민광의 이집트 칼럼 #2] 파피루스① ‘나일강이 건네준 혁명’에 이어 

[문화매거진=한민광 작가] 박물관에서 본 파피루스는 늘 먼 시간 속에 묶여 있는 것 같았다. 유리관 속에서 바스러질 듯 남아 있는 그 얇은 종이는 ‘역사’라는 이름 아래 머물러있다. 그런데 이집트의 어느 작은 시골에 가면 그 파피루스가 아직도 살아 있다. 3천 년 전과 똑같은 방식으로, 오늘도 사람들의 손에서 종이가 태어나고 있었다.

그곳의 파피루스는 누군가의 개인 사업이 아니다. 온 가족이 함께 이어가는 삶의 방식이다. 아버지가 뿌리를 뽑아내면 아들이 줄기를 자르고, 어머니와 딸은 그것을 얇게 켜고 말린다. 그렇게 세대를 거쳐 내려오며 종이는 집안의 숨결과 함께 완성된다.

▲ 이집트 알-카라무스(Al-Qaramous). 파피루스 숲에서 한 남자가 긴 줄기를 조심스레 꺾고 있다. 고대 이집트 문명의 기록 도구였던 파피루스는 지금도 이렇게 재배된다 / 사진: 한민광 제공
▲ 이집트 알-카라무스(Al-Qaramous). 파피루스 숲에서 한 남자가 긴 줄기를 조심스레 꺾고 있다. 고대 이집트 문명의 기록 도구였던 파피루스는 지금도 이렇게 재배된다 / 사진: 한민광 제공


▲ 이집트 여인들이 전통 방식으로 파피루스 줄기를 자르고 다듬고 있다. 수천 년 전과 다르지 않은 손길이 오늘도 종이의 역사를 이어간다 / 사진: 한민광 제공
▲ 이집트 여인들이 전통 방식으로 파피루스 줄기를 자르고 다듬고 있다. 수천 년 전과 다르지 않은 손길이 오늘도 종이의 역사를 이어간다 / 사진: 한민광 제공


농부가 파피루스 줄기를 베어내는 장면을 가까이서 보았다. 무심히 툭 꺾는 것 같지만, 사실은 뿌리에서부터 힘을 주어야만 한다. 잘려 나온 줄기는 20~30센티미터 길이로 가지런히 쌓인다. 신기한 것은 파피루스 줄기의 단면이 세모라는 사실이었다. 다른 나무처럼 둥근 모양이 아니라 건축의 기둥처럼 반듯하게 잘린다. 나는 그 단면을 보면서 ‘자연이 이미 스스로 건축가였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 잘라낸 파피루스 줄기를 얇게 벗겨 물에 담그는 과정이 이어진다. 이 섬유들은 건조 과정을 거쳐 고대 방식의 파피루스 종이로 다시 태어난다 / 사진: 한민광 제공
▲ 잘라낸 파피루스 줄기를 얇게 벗겨 물에 담그는 과정이 이어진다. 이 섬유들은 건조 과정을 거쳐 고대 방식의 파피루스 종이로 다시 태어난다 / 사진: 한민광 제공


잘린 줄기는 다시 낚싯줄 같은 얇은 칼로 곱게 켜낸다. 얇게 잘려나간 조각들이 손에 닿으면 미끄럽고 부드럽다. 그것들은 곧 물과 알코올이 섞인 큰 대야 속에 잠긴다. 하루, 이틀, 때로는 더 오랜 시간 동안 그렇게 불린다.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은 그 과정이, 사실은 가장 중요한 준비다.

▲ 파피루스 섬유를 한 장씩 곧게 펴서 겹겹이 올려놓는 작업이 진행된다. 이렇게 배치된 섬유들은 압착과 건조를 거쳐 단단한 종이로 변한다 / 사진: 한민광 제공
▲ 파피루스 섬유를 한 장씩 곧게 펴서 겹겹이 올려놓는 작업이 진행된다. 이렇게 배치된 섬유들은 압착과 건조를 거쳐 단단한 종이로 변한다 / 사진: 한민광 제공


이후 나무 조각들을 꺼내어 바둑판처럼 하나하나 올려놓는다. 세로로, 그 위에 가로로, 다시 세로로. 서로 겹치며 얽혀드는 순간, 단순한 식물 줄기가 아니라 직물이 된다. 그 모습은 마치 기하학적 무늬가 반복되는 고대 벽화를 보는 듯하다. 이것은 단순함 속의 질서, 질서 속의 아름다움일 것이다.

▲ 겹쳐진 파피루스 조각을 눌러 물기를 빼고 단단하게 붙인다. 햇볕에 말린 뒤 한 장의 파피루스 종이가 완성된다 / 사진: 한민광 제공
▲ 겹쳐진 파피루스 조각을 눌러 물기를 빼고 단단하게 붙인다. 햇볕에 말린 뒤 한 장의 파피루스 종이가 완성된다 / 사진: 한민광 제공


▲ 말린 파피루스 종이를 한 장씩 정리하며 마무리 작업을 하고 있다. 이제 고대의 종이가 다시 생명을 얻어 글과 그림을 담을 준비를 마쳤다 / 사진: 한민광 제공
▲ 말린 파피루스 종이를 한 장씩 정리하며 마무리 작업을 하고 있다. 이제 고대의 종이가 다시 생명을 얻어 글과 그림을 담을 준비를 마쳤다 / 사진: 한민광 제공


겹쳐진 조각 위로 두꺼운 천을 덮고, 기계로 눌러낸다. 물기가 빠지고, 섬유들이 하나로 달라붙는다. 그리고 햇볕에 바짝 말려내면 드디어 한 장의 파피루스가 손에 잡힌다. 표면은 거칠지만, 빛을 받으면 은은하게 비친다. 마치 오래된 캔버스 같기도 하고, 세월의 주름이 담긴 천 조각 같기도 하다. 한 장의 종이가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손길과 시간이 지나갔는지를 떠올리면 쉽게 넘길 수 없다.

▲ 노년의 예술가가 완성된 파피루스 위에 정교한 그림을 그리고 있다. 고대와 현대가 한 장의 종이 위에서 조용히 만나는 순간이다 / 사진: 한민광 제공
▲ 노년의 예술가가 완성된 파피루스 위에 정교한 그림을 그리고 있다. 고대와 현대가 한 장의 종이 위에서 조용히 만나는 순간이다 / 사진: 한민광 제공


완성된 종이는 다시 한 노년의 예술가에게 전해진다. 그는 40년 넘게 파피루스 위에 그림을 그려 온 장인이다. 그의 손은 세월에 닳아 있었지만, 붓끝은 놀라울 만큼 정밀했다. 붓이 종이 위를 스칠 때마다 고대 신들의 얼굴이 살아나고, 나일강의 풍경이 되살아났다. 때로는 동네 시장에서 본 사람들의 모습이 스며들기도 했다. 한 장의 파피루스 위에서 신화와 현실이 나란히 놓였다.

나는 그의 작업을 오래 바라보았다. 종이 위에 색을 입히는 과정은 단순히 그림을 그리는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시간을 불러내는 일 같았다. 수천 년 전 장인이 남긴 흔적이 그의 손끝에서 다시 이어지고 있었다. 그 순간 파피루스는 단순한 종이가 아니었다.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무대였고, 예술가의 손은 그 무대의 조명처럼 빛나고 있었다.

▲ 완성된 파피루스 그림들이 전통 시장의 가게 벽을 가득 채우고 있다. 고대의 숨결이 담긴 예술품들이 오늘도 여행객을 기다린다 / 사진: 한민광 제공
▲ 완성된 파피루스 그림들이 전통 시장의 가게 벽을 가득 채우고 있다. 고대의 숨결이 담긴 예술품들이 오늘도 여행객을 기다린다 / 사진: 한민광 제공


이렇게 완성된 그림들은 결국 관광지에서 판매된다. 여행자들은 기념품 가게에서 그림을 고른다. 파라오 람세스의 초상, 상형문자, 피라미드가 그려진 그림들. 그들에게는 단순히 예쁘고 독특한 기념품일 뿐이다. 하지만 그 뒤에 숨은 수많은 손길과 기다림, 그리고 세월의 무게는 쉽게 전해지지 않는다.

나는 파피루스 그림 한 장을 손에 들고 한참을 바라보았다. 표면의 거친 결은 농부의 땀을 닮아 있었고, 그 위에 올려진 색은 화가의 인생을 닮아 있었다. 그것은 단순히 그림이 아닌, 시간을 겹겹이 쌓아 만든 하나의 예술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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