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구호가 춤으로 지어낸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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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구호가 춤으로 지어낸 세계

더 네이버 2025-09-05 14:06:04 신고

패션에서 무대로, 전통에서 현대로, 시각에서 청각으로. 서로 다른 영역이 정구호의 손끝에서 부딪치고 스며들며 전혀 새로운 감각을 만들어낸다. 익숙한 것이 낯설어지고, 낯선 것이 가까워지는 순간. 정구호가 추구하는 작품 세계는 확장의 궤적이자 완결된 답이 아니라 끝없이 뻗어나가는 대화에 가깝다.
대학 시절 유학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온 그는 패션 디자이너로 먼저 성공을 거뒀으나 사실 그의 무대 업력은 30여 년에 이른다. 뉴욕 유학 시절 친분을 쌓은 무용가 안은미, 안성수의 의상을 제작해주며 일찌감치 무대의상에 발을 들인 것. 그 후 <묵향>(2013), <향연>(2015) <산조>(2021) 등 국립무용단과 협업한 무대를 선보이며 한국무용계에 신선한 충격을 전해온 그는 2022년 초연한 <일무>로 2년 전 미국 뉴욕 링컨센터 무대에 입성하며 전석 매진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외신의 반응도 호평 일색. <케이팝 데몬 헌터스> 등 대중문화를 통해 우리나라 전통문화에 대한 세계적 관심이 어느 때보다 고조된 지금, 정구호를 만나 다시금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무대에 오른 <일무> 공연과 그의 작품 세계에 관해 이야기 나눴다. 시간을 건너는 의식(儀式), 과거와 현재가 맞닿는 찰나의 장면. 어쩌면 우리는 가장 정석의 무대 위에서 예술이 어떻게 과거를 소환하고 미래로 나아가는지를 목격하게 될지도 모른다.

오늘날의 속도와 미감으로 만나는 유네스코 세계인류무형유산 ‘종묘제례악’ 의식무인 <일무>. 

8월 21일부터 세종문화회관에서 <일무> 공연이 열렸는데 2022년 초연 후 꾸준히 사랑받는 이 작품의 창작 과정이 궁금합니다. <일무>는 종묘제례악에 등장하는 의식무(儀式舞)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작품입니다. 조선시대 종묘제례악에서 추는 춤으로 엄숙한 분위기에서 왕이 직관한 춤이죠. 한국적 뿌리를 지닌 전통을 어떻게 오늘의 언어로 옮겨올 수 있을지 고민하며 만든 무대예요. <일무>는 전통 춤 중 유일하게 모든 과정이 기록으로 남아 있는 정석적인 춤인데요. 단순히 이런 전통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 삶과 어떻게 만날 수 있는지 고민해서 만든 무대입니다. 


무대에 올리면서 특별히 신경 쓴 부분은 무엇일까요? 전통이 지닌 무게와 현대 무대 언어 사이의 균형을 잡는 일을 가장 고민했어요. 종묘제례악이라는 고전은 이미 완결된 형식이지만, 전승 공연이 아니기에 어떻게 하면 전통을 어렵지 않고 좀 더 쉽게 감상할 수 있을지 고민을 거듭했죠. 


2025년판 〈일무〉의 무대에는 어떤 변화가 있나요? 기본적인 틀은 거의 똑같은데 조금 변화를 줬어요. 초연 당시엔 의상을 전통에 가깝게 색상 조합을 했는데, 해외 투어를 나가서 보니 이 색이 오히려 동작을 흐리게 만들더라고요. 그래서 이번에는 전통을 고집하기보다는 비비드한 오렌지 등 선명한 색을 넣어 동작이 또렷하게 보이도록 했어요. 또 초연에는 ‘가인전목단’이라는 전통 레퍼토리가 있었는데, 이번에 뺐고요. 전통과 현대를 5:5 비율로 구성을 맞췄습니다. 세종문화회관은 국내에서 가장 큰 공연장이자 가로로 긴 구조라 한국무용과 특히 잘 맞아요. 이 무대가 우리 전통을 공부하는 것이라기보다는 한국 공연 문화를 보여주는 것이라는 부분에 방점을 둔 거죠. 

2023년 뉴욕 링컨센터 공연 전 회차 매진을 기록했다. 올해 <일무>는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총 4회 차 공연을 시작으로 강릉과 대구에서 공연을 이어간다. 


전통을 해체하고 재구성할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원칙은 무엇인가요? 뿌리가 되는 기본은 건드리지 않으려고 노력해요. 한국무용의 호흡, 디딤 같은 기본 어법은 그대로 두고 무대라는 현대 환경에 맞게 표현 방식을 바꾸는 거죠. 원형은 지키되 관객의 시선에 맞춰 과장하거나 단순화하는 방식으로 균형을 찾습니다. 전통과 현대의 비율을 어느 부분에서 잡느냐가 가장 중요한 고민이에요.


무대 작업을 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지점은 무엇인가요? 그리고 작업하시면서 이 작품은 성공할 것 같다는 확신이 드실 때는 언제인지. 작품의 성공을 위해서 작업하진 않아요. 이기적인 얘기일 수도 있지만, 저에게는 자기만족이 제일 중요해요. 저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결과물이 나올 때까지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합니다. 원하는 결과물이 나올 때까지 여러 세부를 살펴보고 설득하는 것이 제 역할이고요. 그렇게 최선을 다했다면 그 이후에 무대 위에서 빚어지는 시간과 그 순간이 관객에게 어떻게 다가갈지는 말 그대로 운명에 맡겨두는 거예요. 제가 만들어내고 싶은 장면을 만들어내면 결과가 좋든 부족하든 크게 타격을 받지 않아요. 태연하게 잊어버리고 다음으로 나아가죠. 


감독님 작업의 특징은 늘 장르 간의 경계를 허문다는 데 있습니다. 이번 작품에서도 그런 시도가 있나요? 옷이란 단순한 의상이 아니라 인물의 감정과 상황을 입체적으로 드러내는 도구이기도 하잖아요. 음악과 무용, 공간이 함께 어우러질 때 더 큰 힘을 갖고요. <일무> 역시 음악, 춤, 무대, 의상을 하나의 유기체처럼 엮어내는 데 초점을 맞췄고요. 각각의 요소가 독립적으로 존재하면서도 서로를 반사해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는 걸 볼 때 쾌감을 느끼죠. 

옷의 색채, 영상과 조명 디자인 등 시각적 요소를 재정비해 감각적 미장센을 선보이는 무대. 2 올해 초 선발된 서울시무용단의 신단원 6명이 포함되어 젊은 에너지와 역동성을 더한다. 3 공연 작품을 올릴 때 가장 희열을 느낀다고 말하는 정구호 예술감독. 

패션, 무용, 오페라, 전시, 앨범 등 다양한 장르에서 활동하시잖아요. 창작의 원천이 궁금합니다. 어디서 영감을 얻으시나요? 끊임없이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편이에요. 언젠가 10초 안에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으면 은퇴할 시기라고 했는데, 아직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작품에 대한 여러 아이디어들이 남아 있어요(웃음).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건, 예전엔 어른들이 한 우물을 파야 한다고 말씀하셨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은 거 같아요. 최대한 많은 것에 관심을 두고 깊이 있게 파야 해요. 내가 아는 것만 보는 게 아니라 다른 영역을 두루 살피다 보면 새로운 아이디어가 생기거든요. 


전통예술에 대한 대중의 흥미를 끌 수 있는 ‘첫 관문’은 무엇이라고 보시나요? 관객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풀어내는 게 가장 중요하죠. 전승 공연이 아니라 창작 공연이라면 관객의 호응과 이해도가 작품의 생명력이 되니까요. 의상, 음악, 조명, 구성 모든 요소에서 조금 더 직관적으로 다가갈 수 있도록 조율합니다. 그렇게 전통을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어야 관객층이 더 넓게 확장됩니다.


다음 행보가 궁금한데요. 새롭게 준비 중인 작품은 어떤 것일까요? 영화나 드라마를 염두에 두고 지금 시놉시스를 다섯 가지 정도 작업하고 있어요. 두 개는 사극이고 세 개는 현대물이죠. 제작을 같이할 분들을 찾고 있어요. 아마 드라마가 먼저 세상에 나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진 제공 (인물)한국문화예술위원회, (공연)세종문화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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