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신문 양우혁 기자】국내 배터리 3사가 북미 에너지저장장치(ESS) 시장 공략에 사활을 걸고 있다. 전기차 시장이 성장 둔화와 정책 불확실성으로 흔들리는 가운데, ESS는 재생에너지 확대와 데이터센터 전력 수요 증가라는 구조적 성장 요인을 지니며 차세대 먹거리로 부상했다.
2일 시장조사업체 글로벌마켓인사이트에 따르면 미국 에너지저장 시장 규모는 2024년 1067억달러(약 149조원)에서 2034년에는 1조4900억달러(약 2080조원)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재생에너지 통합 확대, 전력망 현대화, 인프라 확충이 맞물리면서 ESS 수요가 구조적으로 확대될 것이라는 분석이다.
국내 배터리 업계도 이 같은 성장세에 발맞춰 북미 시장 공략을 강화하고 있다. 전기차 수요 둔화와 정책 불확실성으로 수익 구조가 흔들리는 상황에서, ESS는 안정적이고 장기적인 수요가 기대되는 분야다. 기업별로 차별화된 전략을 앞세워 현지 생산과 공급망 구축, 기술 고도화에 속도를 내고 있다.
LG에너지솔루션은 미국 미시간 홀랜드 공장에서 업계 최초로 ESS 전용 LFP(리튬인산철) 배터리 양산에 돌입했다. 애리조나 신규 공장을 통한 2026년 양산 계획을 1년 이상 앞당겨 기존 EV 배터리 라인을 ESS로 전환하면서 조기 양산을 시작했다는 점에서 업계의 시선을 끌었다. 이를 통해 LG에너지솔루션은 글로벌 주요 배터리 업체 중 유일하게 미국 내에서 ESS LFP를 대규모 생산하는 체제를 확보했다.
이 공장에서 생산된 파우치형 롱셀 LFP 배터리는 이미 테라젠, 델타 등 북미 전력사에 공급이 확정됐다. 현지에서 생산되는 만큼 IRA(인플레이션감축법) 세액공제 혜택을 받을 수 있어 가격 경쟁력에서도 유리하다. 단순히 배터리를 공급하는 수준을 넘어, 시스템 통합 자회사와 협력해 설치·운영 소프트웨어까지 제공하는 ‘원스톱 솔루션’ 전략도 병행한다. LG에너지솔루션은 ESS를 단순한 부품 사업이 아닌 장기적 서비스 모델로 확장해 북미에서 안정적 수익을 확보하려 한다.
삼성SDI는 고용량·장수명 ESS로 시장 차별화를 꾀한다. 대표 제품군인 ‘삼성 배터리 박스(SBB)’는 컨테이너형 일체형 ESS로, 전력망에 연결만 하면 즉시 사용할 수 있는 편의성과 안전성 덕분에 글로벌 시장에서 인정을 받았다. 삼성SDI는 기존 제품 대비 에너지 밀도를 높인 모델과 LFP 셀을 적용한 장수명 모델을 내놓으며 포트폴리오를 확장했다.
ESS는 설치 후 장기간 안정적으로 운영돼야 하기 때문에 배터리 수명이 사업성과 직결된다. 삼성SDI는 자체 알고리즘을 활용해 업계 최고 수준의 장수명을 확보했다고 강조하며, 안전성을 위해 함침식 소화기술(EDI)과 열전파 차단 기술을 상용화했다. 아직 대규모 양산 체제는 갖추지 않았지만, 북미 고객 수요에 맞춘 ESS 전용 제품을 빠르게 선보이며 향후 현지 생산 거점까지 확보한다는 구상이다. 업계에서는 삼성SDI가 고성능·고안전 ESS로 전력망과 데이터센터 시장을 동시에 공략할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
SK온은 후발주자 이미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소재 협력부터 기술 개발까지 속도를 내고 있다. 최근 엘앤에프와 북미 지역 LFP 배터리용 양극재 공급 협약을 체결하면서 현지 밸류체인 강화에 나섰다. 공급 물량과 시기를 구체화하고 장기 계약으로 확대해 가격 경쟁력과 공급 안정성을 동시에 확보한다는 전략이다.
기술 개발도 병행된다. SK온은 2023년 인터배터리 전시에서 업계 최초로 LFP 시제품을 선보인 이후, 저온 성능을 개선한 ‘윈터 프로’와 장수명 LFP 배터리를 잇달아 발표했다. 향후 기존 생산라인을 ESS 전용으로 전환해 신속하게 양산 체제를 구축하고, 미국 첨단제조생산세액공제(AMPC) 요건을 충족해 가격 경쟁력을 확보할 방침이다.
업계에서는 이러한 배터리 3사의 행보가 단순히 신사업 확장이 아닌 ‘생존 전략’에 가깝다고 보고 있다. 한 배터리업계 관계자는 “전기차 시장은 정책과 소비자 심리에 크게 좌우돼 수요 변동성이 크지만 ESS는 전력 인프라라는 구조적 특성 때문에 성장세가 꾸준하다”며 “IRA와 관세 등 정책 환경에 대응하면서도 북미에서 ESS를 선점해야 글로벌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실제로 ESS는 전기차에 비해 불확실성이 상대적으로 낮다는 평가가 많다. 전기차 수요가 금리나 경기 상황, 소비자 선호 변화에 크게 흔들리는 반면, ESS는 재생에너지 확대와 전력망 안정화 같은 국가적 과제와 맞물려 있어 일정한 수요가 담보된다. 소비재 성격이 강한 전기차와 달리 인프라 투자 성격을 지니기 때문에 경기 변동에 따른 위축 위험이 덜하다는 점도 차별화된 요소로 꼽힌다.
업계에서는 글로벌 ESS 시장에서 중국산 각형 LFP 배터리가 90% 안팎을 차지하는 것으로 본다. ESS는 전기차와 달리 에너지 밀도보다 안전성과 가격 경쟁력이 우선되기 때문에 LFP의 수요가 급격히 확대됐다. 전기차 역시 보조금 축소와 높은 가격 부담으로 수요 둔화가 불가피해지면서, 그동안 NCM(삼원계 배터리)에 집중해온 국내 배터리 업체들도 LFP 개발에 속도를 내고 있다.
전문가들은 국내 기업들이 이러한 흐름에 얼마나 신속하게 대응해 LFP 제품을 시장에 보급하느냐가 향후 점유율을 좌우할 열쇠로 보고 있다.
김필수 대림대 미래자동차학부 교수는 “인공지능 활용이 확산되면서 데이터센터 등 전력 소비가 많은 인프라가 급격히 늘어나고 있어 ESS 수요도 빠르게 확대되고 있다”며 “ESS는 전기차처럼 높은 에너지 밀도를 요구하지 않기 때문에 공간 제약이 덜한 데이터센터나 발전소에서는 가격이 저렴하고 화재 안전성이 뛰어난 LFP 배터리가 더 적합하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중국이 선도하는 LFP 분야에서 국내 기업이 경쟁력을 확보하려면, 이러한 배터리를 얼마나 신속하게 시장에 보급하느냐가 향후 점유율을 좌우하는 핵심 요소가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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