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집자 주 = 한국국제교류재단(KF)의 지난해 발표에 따르면 세계 한류 팬은 약 2억2천500만명에 육박한다고 합니다. 또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초월해 지구 반대편과 동시에 소통하는 '디지털 실크로드' 시대도 열리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한류 4.0'의 시대입니다. 연합뉴스 동포·다문화부 K컬처팀은 독자 여러분께 새로운 시선으로 한국 문화를 바라보는 데 도움이 되고자 전문가 칼럼 시리즈를 준비했습니다. 시리즈는 매주 게재하며 K컬처팀 영문 한류 뉴스 사이트 K바이브에서도 영문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8월에서 9월에 접어드는 계절, 우리나라 해안 곳곳의 포구는 장관을 이룬다. 그물에서 막 건져 올린 오징어가 햇살을 받아 은빛 비늘을 반짝이며 살아 꿈틀거린다.
조용한 마을에도 웃음과 활력이 돈다. 이 시기 오징어는 살이 오르고 감칠맛과 단맛이 최절정에 이른다. 해풍 가르며 서 있노라면, 오래된 파도 소리와 더불어 바다와 인간이 함께 엮어 온 오징어의 깊은 이야기가 귓가에 밀려온다.
우리나라 사람에게 오징어는 오랜 시간을 함께한 역사적 식재료다. 오랜 세월, 한반도 세 바다를 두루 채웠던 오징어는 생존, 문화, 경제의 핵심이었다.
옛 문헌에도 오징어(烏賊魚)는 어체가 길고 껍질이 얇으며, 잘 건조해도 맛이 변하지 않는 귀한 어종으로 기록돼 있다. 조선 후기에는 이미 강원, 경상 지역의 어민들이 건조 오징어를 교역품으로 삼았고, 고려시대부터는 먹물(墨)이 나오는 특징으로 인해 묵어(墨魚)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오징어는 겨울 저장식품이었고, 특히 마른오징어 '어화'(魚花)는 꽃처럼 예쁘게 오려 혼례상과 제사상에 올랐다. 동해, 울진, 속초 해안에는 여름밤 집어등 아래 오징어잡이 배들의 불빛이 관광 명소가 되기도 했다.
◇ 오징어 식문화
약선에서 오징어는 성질이 평하고 맛이 달고 짜며, 간(肝)과 신(腎) 경락으로 들어간다고 기록됐다. 허약, 빈혈, 골다공증 개선, 피부 윤택, 음(陰) 보충과 기력 회복, 소화기 강화 등에 탁월하다고 여겼다. '동의보감'에도 '위와 혈을 보호하고 원기를 보충한다'는 대목이 등장한다.
현대 영양학 역시 이러한 전통적 지혜를 뒷받침한다. 오징어는 100g당 약 87kcal라는 낮은 열량에, 단백질이 18%나 들어 있어 소고기보다 3배 이상 많다. 지방은 1%로 최소 수준이고, 불포화지방산(특히 DHA, EPA)이 풍부해 심혈관 건강과 두뇌 발달에 도움을 준다.
오징어의 핵산, 셀레늄, 타우린(어패류 중 최고 수준)은 면역력·항암 효과·콜레스테롤 저하·노화 방지에 탁월하다. 특히 타우린은 피로물질(젖산) 분해, 간 기능 개선, 콜레스테롤 조절에 핵심이다. 오징어에 들어있는 핵산 성분과 셀레늄은 각종 성인병과 노화 예방의 건강 소재로 학계에서 주목받고 있다.
오징어 먹물도 항암·항균 효과가 과학적으로 입증된 바 있다. 단, 퓨린 함량과 강한 산성 특성 탓에 통풍 환자나 위궤양 환자는 과다 섭취에 주의해야 한다.
오징어는 바다를 생업 삼아 살아온 많은 사람의 식문화와 직접 맞닿아 있다. 여름철 동해안, 속초·울진·삼척·강릉 해안마다 펼쳐지는 오징어 말리기 풍경은 계절의 상징이었다. 햇볕과 바닷바람의 건조대에 걸린 오징어가 만국기처럼 펄럭이고, 그사이 뛰노는 아이들, 밤이면 숯불에 마른오징어 한 마리 구워 온 가족이 나누던 기억이 있다. 음식은 생존이면서도 정서의 고리였다.
강원도와 동해안의 대표적인 향토 음식 오징어순대는, 몸통에 당면, 채소, 두부 등을 가득 채워 쪄먹는 독특한 음식이다. 근대 이후 어려웠던 시기, 단백질과 포만감을 한 번에 채우는 에너지 음식이 됐고, 오징어젓갈, 마른오징어 '피데기' 등은 겨울 식량과 군량, 술안주와 간식으로 재탄생했다.
술자리의 오징어볶음, 각종 반찬으로의 변주, 오징어튀김, 오징어덮밥 등 오늘날에도 수십 가지 조리법으로 국민 식탁을 풍성하게 했다. 일본을 제외하면 이렇게 마른오징어를 대중적으로 즐기는 문화는 사실상 한국만의 특색이다.
◇ 손자병법으로 본 오징어 요리
주방에서의 전략도 전장에서의 전략과 통한다. 손자병법 '작전(作戰)'의 장은 무분별한 자원 소모가 아닌, 철저한 준비와 자원 활용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오징어 한 마리를 손질하는 법도 다르지 않다.
다리, 몸통, 껍질, 먹물까지 버릴 곳 없이 부위별로 나눠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다.
오징어회는 '속전속결 기동전'과 같다. 선도 유지가 생명이며, 신선도를 살려낸 자연의 단맛과 식감은 최고의 요리다.
오징어순대는 '군량 보급'에 적용할 수 있다. 한 마리에 당면·채소·두부를 채워 찌면 영양을 극대화하고, 질 좋은 한 끼를 완성한다.
오징어볶음은 '화력 집중 결전'이다. 센 불 앞에서 고추장 양념과 신선한 채소가 어우러지면, 입안에 매운 향과 불맛, 응축된 에너지가 넘친다.
마른오징어는 '장기 저장 전략'으로 군량처럼 비상식량이자, 술안주나 반찬 등 다목적으로 활용된다. 오징어젓갈은 '병참 지원'으로 시간이 지날수록 깊어진 발효의 풍미가 밥상 후방을 든든하게 지킨다.
이처럼, 오징어 한 마리는 주방 '작전'의 좋은 본보기다. 부위를 적재적소에 쓰면, 한 마리가 다섯 가지 이상의 요리로 바뀌며 식탁을 풍성하게 한다.
오징어는 바다가 오랜 세월 사람에게 내준 최고의 선물이었다. 역사 속에서 교역의 매개체, 공동체의 상징, 가족을 잇는 정서, 보양과 건강의 공식, 그리고 오늘날 웰빙 식탁의 주역까지 다양한 얼굴을 지닌다.
이처럼 오징어는 현대 식습관과 영양학적 이점이 다양하고 필자에게도 식재료 이상의 추억이 많다. 해풍 가득한 바닷가에서, 여름밤 별 아래서, 겨울난로 곁에서 나눈 오징어 한 점은 고향과 가족의 기억, 추억의 한 조각이다. 변화하는 시대에도, 오징어는 늘 우리 곁에 남아 바다와 인간의 긴 이야기를 이어오고 있다.
최만순 음식 칼럼니스트
▲ 한국약선요리 창시자. ▲ 한국전통약선연구소장. ▲ 중국약선요리 창시자 팽명천 교수 사사 후 한중일 약선협회장 역임.
<정리 : 이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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