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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조약은 일주일 뒤인 8월 29일 공포가 이루어져 대한제국은 멸망하고 제2차 대전 종전 전까지 35년 동안 한반도는 일제 식민지가 됐다.
국권을 빼앗긴 치욕의 날이었기에 오늘날 이 사건은 경술국치, 국권피탈, 한일병탄 등의 다른 이름으로 많이 불린다. 다만 이 조약은 일제의 식민지 침략 작업 마침표였을 뿐 국권을 빼앗기 위한 작업은 이미 그 이전에 완성돼 있었다.
1904년 한일의정서를 시작으로 1905년 을사늑약, 1907년 정미 7조약, 1909년 기유각서 등으로 일제는 한국의 행정권, 입법권, 경제권, 외교권, 사법권 등을 차례로 박탈하고 군대까지 해산시키며 대한제국은 국가로서의 기능을 이미 상실한 상태였다.
나라가 망해버렸으니 대한제국이나 한국 같은 국호 역시 당연히 사용할 수 없게 됐고, 1919년 3.1운동으로 위기감을 느낀 일제는 태극기와 애국가 사용도 금지했다.
조약에 기꺼이 찬성하며 앞으로도 잘먹고 잘 살 생각에 들떠있던 매국노들은 을사늑약 당시보다 더 늘었다. 을사늑약 당시 을사오적이 있었다면 경술년에는 8명의 경술국적이 있었는데, 오늘날 가장 유명한 매국노 이완용은 을사늑약에 이어 병합조약에도 어김없이 찬성하며 나라 팔아먹는 경쟁에선 제일임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경술국적들은 병합 찬성 대가로 일본의 귀족 작위를 받았고 거액의 은사금까지 받아 살아 생전 호사를 누리고 후손들 안녕까지 챙길 수 있었다.
반면 나라를 잃은 슬픔을 이기지 못해 스스로 목숨까지 끊은 이들도 있었는데, 친러파 외교관으로 ‘헤이그 특사’ 이위종의 아버지였던 이범진, 소설 ‘임꺽정’의 저자인 홍명희의 아버지 홍범식 등이 자결했다. 연구에 따르면 경술국치 이후 1912년까지 2년 동안 자결한 사람만 50명이 넘는다.
일제가 패망하고 나라도 되찾았지만 식민지배의 후유증은 오래 가고 있다. 조약 이후 100년도 넘은 지금 강제징용, 위안부 피해자 배상 문제는 물론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의 재산 몰수 문제가 거론되는 상황을 보면 그 영향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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