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한 줄 평
“발칙한 상상과 언어유희를 즐기다가 가족의 덫에 걸린 한 사람을 발견하곤 그 절절한 사랑에 뭉클해진다.”
▲시 한 편
<천천히 거짓말이 자랄 수 있도록> - 정원선
어항 속에 손을 넣어 일기를 쓰고 싶었다
불가능한 일인 줄 알았지만 그러고 싶었다
그 후에는 손가락에서 지느러미가 자랄 수 있도록
잔잔한 파도가 일었으면 싶었다
어항 속에서 재미를 가르치는 금붕어를 만났으면 좋겠는데
이번 생에서는 틀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재미 대신에 의미를 찾고 싶어졌다
지느러미 대신에
여덟 개의 거미 다리를 가지고 싶어졌다
어항 속에서 일기를 쓰는 대신
거미줄로 거미집을 짓고 싶어졌다
물속에 거미집을 짓고,
그 속에서 피아노 연주 소리를 듣고 싶어졌다
마지막 소원이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어항의 바닥에 닿은 금붕어처럼
입으로 거품만 날리고 있었다
이 거품들은 싸움을 싫어해
서로 엉키는 것을 싫어한다고 했다
제길 나는
매일 거짓말로 일기를 쓰는 양치기 소년도 아니고,
자의식을 가진 거미 다리도 아니고,
거품 연주에 재능을 가진 금붕어도 아닌 것을-
다음번에는
천천히 거짓말이 자랄 수 있도록
어항 속에 손을 집어넣어 누군가의 일기장을 훔치고 싶어졌다
불가능한 일인 줄 알았지만 계속 그러고 싶어졌다.
▲시평
“어항 속에 손을 넣”거나 “여덟 개의 거미 다리를 가지”는 일은 가능하지만, 어항 속에서 “일기를 쓰”거나 “재미를 가르치는 금붕어를 만”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손가락에서 지느러미”가 생겨나거나 물속의 거미집에서 “피아노 연주 소리를 듣”는 일도 가능하지 않다. 시인은 가능한 일은 ‘의미’, 불가능한 일은 ‘재미’라고 규정한다. 한데 왜 어항이고, 일기일까. 시인은 이 시 바로 앞에 수록한 시 〈어항 –희귀병〉에서 장모님이 돌아가시면서 흘린 마지막 눈물방울을 어항에 집어넣었는데, 아내는 날마다 어항 속에서 어머니를 만난다고 했다. 또 우리가 모르는 세상이 어항 속에 담겨 있다고 믿는다고 했다. 이 시는 〈어항 –희귀병〉의 연작이면서 후일담이다. 일기는 날마다 자신이 겪은 일이나 생각, 느낌 등을 사실대로 적은 기록이다. 어항이라는 공간은 ‘이생’에 존재하지만, 그 속의 이야기는 ‘내생’인지라 기록할 수 없다. 살아 있는 금붕어는 눈으로 볼 수 있지만, “재미를 가르치는 금붕어”, 즉 평소 피아노를 연주하던 장모님을 만날 수는 없다. 사랑하는 사람을 보낸 상처와 슬픔이 고여 있는 어항 밖의 일만 일기로 쓸 수 있을 뿐이다. 어항 속에 손을 넣는 행위는 이생과 내생을 이어주고 싶은 간절한 염원, “잔잔한 파도”는 기적을 상징한다. “마지막 소원”이라 했지만, 그런 일은 “이번 생에서는” 일어날 수 없다. “입으로 거품만 날리”듯 형식적이거나 “양치기 소년”처럼 거짓말을 할 수도 없다. 그건 양심상 할 수 없다. 산 사람과 죽은 사람 사이, 아니 죽음보다 깊은 슬픔을 위로할 방법을 찾지 못한 시인은 좌절한다. “천천히 거짓말이” 는다면 다음번에는 어항 속에 손을 넣어 일기를 쓰는 것이 아니라 아예 “누군가의 일기장을 훔”치려 한다. 그렇다면 어항은 저승으로 통하는 문이 된다. 이마저 꿈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이 시는 어항 속 현실과 환상을 통해 가족에 대한 절절한 사랑과 그리움을 담고 있다. (김정수 시인)
▲김정수 시인은…
1990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했다. 시집 『사과의 잠』 『홀연, 선잠』 『하늘로 가는 혀』 『서랍 속의 사막』과 평론집 『연민의 시학』을 냈다. 경희문학상과 사이펀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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