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백향의 책읽어주는 선생님'
"이 이야기들은 우리가 삶에서 답해야 하지만 수시로 거짓말을 하며 도피해버리는 깊은 영역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 프랑크푸르터 노이에 프레세
여름이 되면 여름 배경의 소설을 읽고 싶어진다. 계절의 나른함과 열정이 배어있는. 올해 내 눈에 들어온 책은 베른하르트 슐링크(1944~)의 『여름 거짓말』이다. 모두 여름이 배경인 단편집이다. 일찌기 『책읽어주는 남자』로 알려진 작가다. 이 영화에 푹 빠져, 여러번 보면서 읽어주기와 사랑에 관해 탐색했던 시절도 있었다. 물론 책도 읽었다. 다른 책으로 연결은 못했었는데, 이렇게 세월이 흐른 후 다시 만났다.
그러고 보니 체호프 단편집에 이어서 사랑을 주제로 한 단편집을 또 읽게된 셈이다. 러시아에서 독일로 날아갔다. 체호프에서 넘어오니 한결 읽기가 수월했다. 비밀을 품은 서사는 자연스럽게 흘러가고, 그 안에서 문장도 아름답다. 자존감 낮고 경제적으로도 풍요롭지 않은 남자의 푸념은 마찬가지였지만, 매우 솔직한 태도로 서술해서 그런가보다. 인터뷰를 보니 베른하르트는 명제를 전달하기 위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쓰고 있다고 했다. 이해가 되는 부분이었다.
<성수기가 끝나고> 리처드의 결론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나혼자산다’ 시대의 적절한 결말이라고나 할까. 성수기가 끝난 휴가지에서 만난 여인은 나보다 부유한 사람이었고, 그것을 감수하는 과정이 좋았다가, 괜찮았다가, 결국은 피해버리고 마는 과정을 소설에서 보여주었다. 그런데 그 찌질한 마음이 이해된다. 옳고 그름이 아니라, 그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그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시대적 반영일수도 있고, 본성에 충실한 것일 수도 있다.
<마지막 여름> , <뤼겐섬의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 , <남국 여행> 에서는 내가 생각한 여름의 낭만이 아닌, 늙음을 마주하는 나이든 사람들의 상념이 드러난 소설들이다. 나이들어, 아니 삶의 끝에서의 태도는 어때야 하는지 질문한다.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시선으로.
늙어야 비로소 자식으로 향했던 마음, 부모로 향했던 마음이 비로소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시기라고. 인생을 통과하며 사랑의 상실을 겪었고, 의심없이 믿었던 사랑이 거짓이었음을 들여다보게 된다. 관계란 그런 것. 끝난 사랑의 정체도 받아들이게 되고.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그때 그때 최선이었음도. 자연스럽게 요즘의 '나'로 생각이 옮겨진다. 어떻게 늙을 것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고작 요정도 사랑 지키기도 왜 그리 어려운가.
또 한가지, 베른하르트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을 발견했다. '책 읽어주기에 관한 것'이다. 그는 여러 소설의 장면 속에서 그 시기에 적절한 책읽어주기의 아름다움과 의미들을 피력했다. 특히 어린 손자 손녀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할머니의 방식, 그것을 감사하게 생각하는 손녀의 고백 장면은 그야말로 감동 아닌가. 손녀가 재미있게 읽은 작가의 책을 소포로 부쳐주는 센스처럼 말이다. 그런 문장들을 발견할 때 기뻤다.
베른하르트는 "모든 글쓰기는 자서전적이다."라고 했다. 글을 읽다보면 그런 부분을 충분히 감지할 수 있다. 작가 경험의 범위가 드러나는 소설적 상황과 문장 덕분에 술술 읽히기 때문이다. 나이들어 가는 작가의 인생과 고민이 책 속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책에서 인생을 배우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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