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발사=의사?.jpg

실시간 키워드

2022.08.01 00:00 기준

이발사=의사?.jpg

시보드 2025-08-05 18:38:02 신고

내용:


17543866632503.jpg


중세 유럽 특히 13세기 중엽의 파리대학은 
당시 가장 권위 있는 의과대학 중 하나였으나
뜻밖에도 외과 수업을 정규 과정에서 
완전히 폐지하는 결정을 내린다 
그 이유는 단순했다. 
“외과는 고귀한 의학의 일부가 아니다”는 
인식 때문이었다. 수술이나 상처봉합
고름을 짜는 일은 지나치게 육체적이고 
비천한 노동으로 간주되었고
이 정도 일은 굳이 박식한 의사가 아닌 
이발사에게 맡겨도 충분하다는 사고방식이 지배적이었다.


17543866642809.jpg


이에 따라 당시 의사들이 추구한 것은 보다 
지적인 행위 이를테면 환자의 피를 뽑아내거나 
관장을 통해 내장을 비우는 방식의 치료였다. 
당대에는 몸속의 나쁜 피나 기운을 제거해야 
병이 낫는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내과는 학문적 권위와 실질적 영향력을 
점점 더 강화해 나갔고
외과는 점차 주변으로 밀려나게 된다.


17543866655999.jpg


파리대학의 결정은 도미노처럼 유럽 전역으로 퍼졌다. 
에든버러, 런던, 앤트워프 등지의 대학들 
역시 외과 과정을 폐지하거나 축소하기에 이른다. 
자연스럽게 외과의사들은 설 자리를 잃었고
그들의 역할과 명예는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하지만 여기서 외과의사들은 순순히 
무너지고만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들은 각자의 도시에서 독립적으로 
대학을 세우기 시작했다. 
내과 중심의 교육체계에서 배제된 이상
자신들만의 체계로 교육을 시키고 후학을 
양성하자는 움직임이었다. 
이는 단순한 밥그릇 싸움을 넘어
자신들의 직업적 정체성을 지키려는 생존 투쟁이기도 했다.

이런 외과의사들의 단결은 점차 
형식과 상징을 만들어냈다. 
예를 들어, 당시 이발사들과의 차별화를 위해 
외과의사들은 길고 품위 있는 가운을 입기 시작했다. 
이는 단순한 복장 차원이 아니라
 “우리는 단순한 기술자가 아니라, 존중받아야 할 전문가다”
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외과의들의 반격이 거세지자 
내과 진영도 다시 움직인다. 
그들은 기존의 이발사들을 단기간 교육시켜 
외과적 처치를 가능케 하는 
‘속성 외과 과정’을 개설한다. 
이는 외과의사들의 권위와 전문성을 
약화시키려는 목적이었다. 
누구나 짧은 교육만 받으면 외과 행위를 
할 수 있다는 인식을 퍼뜨리려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이발외과의사’라는 
이종 직군이 사회에 퍼지게 된다.


17543866666558.jpg


이렇게 의료계가 내과 중심으로 재편되고 
외과는 그늘로 밀려난 상황에서도
외과의들은 단결하며 자신들만의 길을 개척해 나갔다.
이발사와 구분되는 전문성을 강조하기 위해
이들은 ‘정규 외과 교육’을 이수한 자만 가입할 수 있는 
조직을 만들고 이를 통해 인증받은 외과의라는 
상징으로 청백적줄무늬 간판을 병원 앞에 걸기 시작한다.

다만 그 색의 배열이나 회전 방식은 
이발사와 차별화되도록 살짝 달리했는데
이것이 오늘날 이발소 앞에 흔히 걸려 있는 
‘회전하는 청백적 간판’의 시초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 대중들은 
정규 외과 교육을 받은 외과의와
속성 이발외과 출신을 쉽게 구별하지 못하게 되었고
오히려 외과 전체에 대한 신뢰도가 추락하기 시작했다.

“어디가 진짜 의사인지 모르겠어요.”
“외과에 가봤자 고름 짜고 빨간약이나 바르던데
그거면 이발소 가도 되겠더라니까요.”

이렇듯 외과는 ‘돌팔이’라는 비아냥을 듣는 처지로 전락했다.
내과 진영이 바랐던 여론몰이에는 성공한 셈이었다.
의사란 곧 내과의라는 인식이 자리 잡았고
외과는 ‘2류’라는 꼬리표가 붙었다.

그러나 이 모든 흐름을 뒤집어버릴 한 인물이 등장한다.
바로 ‘태양왕’ 루이 14세. 절대왕권을 
구축하며 유럽을 지배하던 프랑스의 국왕이었다.


17543866681828.jpg

17543866699609.jpg


루이 14세는 말년에 극심한 치질을 앓았다.
좌불안석은 물론, 앉지도 걷지도 못할 지경이었고 
통증은 왕의 권위마저 흔들 정도였다.
문제는 그를 진료하는 어의들 역시 당시 주류였던 
내과의들이라는 점이었다.

이들은 연고를 바르고 고약을 붙이고
끊임없이 관장을 하며 ‘치료 중’이라는 시늉만 반복했다.
실제로 루이 14세는 생애 동안 2천 회가 넘는 
관장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아무리 관장을 해도 증세는 나아지지 않았고
결국 루이 14세는 내과 방식의 치료에 회의를 품는다.

왕은 더 이상 이론이나 기운 같은 말장난이 아니라
실제로 자신의 항문을 ‘직접’ 살펴볼 것을 명한다.
검사를 해보니, 항문 안쪽에 작은 혹이 발견되었다.
내과의들은 이를 치핵으로 판단했지만
문제는 누구도 ‘이걸 어떻게 처리할지’ 몰랐다는 데 있었다.

그때, 한 외과의가 등장한다.


17543866707688.jpg


샤를 프랑수아 펠릭스는 수년간 치질 치료에 
매진해 온 외과의사였다.
그동안 수많은 환자들을 상대로 임상 실험을 거치며 
자신만의 수술법을 정립했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왕의 치질도 
고칠 수 있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물론 그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펠릭스가 실험 대상으로 삼았던 이들 중 일부는 
수술 도중 사망했고,
“환자가 죽으면 몰래 공동묘지에 묻는다”는 
소문까지 퍼져 있었다.
이 때문에 루이 14세는 망설였다. 
몸에 칼을 댄다는 것 자체가 당시로선 파격이었고
게다가 ‘전통적인 의사’가 아닌 외과의
그것도 이발사 출신과 별반 다르지 않게 
여겨지던 인물을 신뢰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의 항문은 더 이상 
그 어떤 것도 참아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연고도, 고약도, 관장도 아무런 효과를 보이지 않자 
결국 결단을 내린다.
항문에 칼을대기로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치질 수술이 끝나자마자 루이 14세는 빠르게 회복했고
고통에서 해방되었다.
왕은 크게 감동했고 
펠릭스는 단숨에 왕의 ‘은인’으로 떠오른다.

왕이 인정하면 귀족 사회도 따르기 마련이다.
베르사유 궁전의 귀족들 역시 치질을 앓고 있었고
이들 또한 펠릭스를 찾기 시작했다.
그가 고안한 수술법은 유행처럼 퍼졌고
펠릭스의 명성은 곧 외과의 전체의 위상으로 이어졌다.

그전까지 외과의는 이발사 수준으로 취급되며 
조롱받던 직군이었다.
그러나 ‘왕의 똥꼬를 구한 의사’라는 
극적인 사건 하나로 판이 바뀌었다.


17543866722002.jpg



절대왕정 하에서 왕의 신임은 
곧 권력이며, 권위였다.
왕이 인정한 외과의는 
더 이상 하급 기술자가 아니었다.

이제 외과는 유럽 전역에서 각광받는 학문이 되었고
외과의사들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다양한 수술기술을 발전시키며 
본격적인 의학 전문 영역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물론, 루이 14세의 치질이 아니었더라도 
언젠가는 외과의 중요성이 부각됐을 것이다.
의학은 점차 실증적 방법론과 경험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사는 늘 필연과 우연의 교차로에서 움직인다.
왕의 치질이라는 사소한
(그러나 매우 고통스러운) 사건이 역사의 변곡점이 되어
외과의들은 한발 먼저
그리고 더 높이 올라설 수 있었던 것이다.



Copyright ⓒ 시보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본 콘텐츠는 뉴스픽 파트너스에서 공유된 콘텐츠입니다.

다음 내용이 궁금하다면?
광고 보고 계속 읽기
원치 않을 경우 뒤로가기를 눌러주세요

실시간 키워드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0000.00.00 00:00 기준

이 시각 주요뉴스

알림 문구가 한줄로 들어가는 영역입니다

신고하기

작성 아이디가 들어갑니다

내용 내용이 최대 두 줄로 노출됩니다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이 이야기를
공유하세요

이 콘텐츠를 공유하세요.

콘텐츠 공유하고 수익 받는 방법이 궁금하다면👋>
주소가 복사되었습니다.
유튜브로 이동하여 공유해 주세요.
유튜브 활용 방법 알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