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리뉴스 김성지 기자] 미국이 한국과의 관세 협상에서 비관세 요인으로 지적한 쌀·소고기·과일 등 농축산물 시장 개방을 요구하고 있는 가운데 일본과 마찬가지로 일부 농축산물 개방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란 전망이 우세해지면서 농민단체를 중심으로 거센 반발이 일고 있다.
쌀과 소고기 개방은 농업계에 직접적인 타격을 주는 농수산물로, 정부는 관세 협상 테이블에 올리지 않겠단 내부 방침을 세우며 협상 불가능한 '레드카드'로 삼겠다고 밝혔지만 이미 일본은 쌀, 영국은 소고기 개방 협상이 타결되면서 우리나라도 협상을 지켜봐야 하는 상황이 됐다.
그동안 미국은 30개월 이상 소고기의 수입 허용과 쌀 수입 확대, 유전자변형농산물 규제 완화 등을 요구해 왔다.
쌀은 농민의 생계와 연결된 품목으로 한국은 쌀을 5% 관세로 수입하고 있다. 소고기의 경우 30개월 이상 소에서 광우병(BSE)의 원인으로 지목되는 위험 물질이 검출될 가능성이 높다고 알려져 한국은 30개월 령 미만의 미국산 소고기를 수입하고 있다.
지난 2008년 이명박 정부가 30개월 령 이상 쇠고기 수입 의견을 밝히자 광우병 위험 소고기에 반대하는 촛불시위가 전국으로 번지기도 했었다. 농민들은 관세 협상을 지켜보며 쌀, 소고기 관세를 협상할 경우 농성과 시위 등 단체행동을 예고하고 있다.
특히 지난 14일 협상 부서인 산업통상자원부 여한구 통상교섭본부장이 방미 결과와 협상 추진 방향을 발표하며 "농산물도 전략적 판단을 해야 한다. 민감한 부분은 지키되 그렇지 않은 부분은 협상의 전체 큰 틀에서 고려해야 할 부분이 분명히 있다"고 말해 대미 관세 협상에서 농산물 시장 개방이 협상 카드로 쓰일 수 있단 뜻으로 해석되며 파장을 일으켰다.
해당 발언 이후 농축산업 단체는 즉각 성명을 내고 정부가 농축산물을 양보한다면 투쟁에 나서겠다고 경고했다.
일본은 쌀·영국은 소고기 개방 협상에 전격 타결
미국과 무역 협상을 완료한 국가는 영국과 베트남, 인도네시아, 필리핀, 일본까지 모두 5개국으로 대부분 자국의 농산물 시장 확대를 카드로 썼다.
일본은 미국과 상호관세 세율을 25%에서 15%로 낮추는 대신 쌀과 일부 농산물 시장을 개방했다.
영국도 미국산 소고기와 농산물 수입을 확대하는 조건으로 미국에 영국산 자동차와 철강, 알루미늄에 대한 관세를 내렸다.
인도네시아의 경우 미국이 부과하는 상호관세 세율을 32%에서 19%로 낮추는 대가로 미국이 수출하는 품목인 자동차와 농산물, 의약품에 대한 각종 규제 적용을 면제하기로 했다.
이들 국가의 협상 결과를 고려하면 미국이 우리 협상단을 상대로 농산물 추가 개방 압력 수위를 높일 가능성도 점쳐지고 있다.
농업계 반발 고려 '쌀·소고기' 대신 '연료용 작물' 수입 제안
정부는 22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대외경제장관회의에서 농산물 품목인 쌀과 소고기 시장 개방은 협상 카드로 제시하지 않기로 결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농산물 분야 협상 카드로 미국이 요구한 미국산 쌀 수입 확대와 30개월 령 이상 미국산 소고기 수입 허용이 쟁점으로 거론됐으나 정부는 농가 경제에 미치는 영향과 민감도를 고려해 두 품목을 '레드라인'으로 설정한 것으로 전해졌다.
쌀은 미국과 중국, 호주, 태국, 베트남 등 5개국에 저율관세할당물량(TRQ)을 적용하고 있고 이 중 미국에 할당된 물량은 13만2304톤으로 32%를 차지한다. 만약 미국 물량을 늘리고 다른 나라의 물량을 줄이려면 세계무역기구의 동의를 받아야 하며 미국만 단독으로 늘리려면 통상절차법에 따라 국회의 동의가 필요하다.
소고기는 가축전염병 예방법에 따라 광우병이 발생한 날부터 5년이 지나지 않은 국가의 30개월 령 이상 쇠고기는 수입 금지 품목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를 미국과 관세 협상에서 허용하면 유럽연합(EU)을 비롯한 다른 나라와의 협상에서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정부는 이러한 상황과 농민들의 반발을 고려해 농산물 시장 개방을 통상 카드로 써야 할 경우 '연료용 농산물' 수입 확대를 고려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도 바이오에탄올용 옥수수 같은 연료용 작물의 수입이 가능하고 식량용 작물과 시장 자체가 달라 식량안보 문제에 미치는 영향이 적다는 판단에서다.
옥수수의 경우 자급률이 0.7%에 불과해 국내 생산자와 충돌 우려가 없는 작물로 꼽히며 오히려 안정적인 공급이 가능해질 수도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수입한 옥수수를 주로 사료용과 식용(전분당)으로 쓰인다.
다만 정부가 대안으로 제시하는 협상 카드를 미국에서 수용할 지 여부는 알 수 없다.
대통령실, 美日 무역협상 타결에 "협상에 참고…국익 우선"
대통령실은 23일 미일 무역협상 타결과 관련해 "우리 협상에도 참고할 부분이 있으면 참고하겠다"며 "국익을 우선으로 협상하겠다"고 밝혔다.
강유정 대변인은 브리핑에서 미일 관세협상에 대한 질문을 받고 "미국과 일본의 협상 결과에 대한 세부 내용은 파악 중"이라고 말했다.
현재 안보실장과 통상교섭본부장이 방미 중이며 이번 주 내에 경제부총리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도 미국 주요 인사와 면담이 잡혀 있는 상황이다.
정부는 25일 한미 '2+2 통상협의'를 앞두고 정부가 농축산물 시장 개방 방안에 관해 부처 간 조율을 마친 것으로 전해졌다.
그간 미국의 농축산물 품목 추가 개방 요구에 정부 내에서는 부처 간 미묘한 차이가 드러났었다. 협상 주무부서인 산업통상자원부는 신중하게 검토하겠다는 입장이지만 농림축산식품부는 단호하게 반대 입장을 밝혀왔다.
산자부는 관세 협상에서 다양한 카드가 제시되기 때문에 당장 농축산물 시장 개방 카드가 실현되는 것은 아니며 농축산물 개방이 민감한 사안인 것을 인지하는 만큼 추진에 신중을 기하겠단 입장이다.
하지만 농축산물 주무 부처인 농림축산식품부는 소고기와 쌀 등 미국산 농축산물 시장 개방에 '시장 개방 불가' 입장을 고수해 두 부처 간의 합의 내용도 관세 협상에 주요 요인으로 작용할 전망이다.
이런 가운데 김민석 국무총리는 22일 한·미 간 관세 협상과 관련해 "시간이 아직도 많이 남았다"고 말했다.
김 총리는 주한미국상공회의소 세미나에서 기조연설에 나서 "당면한 관세 협상에 있어서 문제를 푸는 것에서 한 발 나아가서, 우리가 트럼프 대통령에게 기대하고 협력할 수 있는 공간이 있을 수 있지 않는가"라며 "저는 그러한 상상을 해본다"고 전했다.
정치권, 농민단체에 동조하며 정부 압박 "농업 희생 안 돼"
여야 정치권도 농업 분야의 일방적 희생을 협상 카드로 제시하지 말 것을 당부하며 정부를 압박했다.
국회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 소속 의원들과 여야 지도부는 잇따라 입장을 내며 농축산물을 협상 카드로 삼아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김병기 더불어민주당 당대표 직무대행 겸 원내대표는 지난 17일 열린 정책조정회의에서 "미국은 쌀과 소고기 수입 규제 완화, 유전자변형작물(GMO) 수입 허용 등 시장 개방을 요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며 "우리는 농민의 생존권과 식량주권, 국민의 건강을 지켜야 한다"고 말했다.
김 원내대표는 "어려운 일이라는 걸 잘 알지만 국민주권정부, 이재명 정부라면 해낼 수 있다"고 당부했다.
송언석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 겸 원내대표는 18일 열린 원내대책회의에서 농축산물 수입 확대에 대한 우려를 드러냈다.
송 비대위원장은 "여한구 통성교섭본부장이 농산물 시장 개방을 시사하는 발언을 했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도 한국의 농축산물 시장 개방을 직접 언급하면서 우리 농가의 불안감이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사과 등 과일류와 소고기 수입이 확대될 경우 국내 농축산물의 경쟁력은 크게 위축될 것이며 우리 농민이 입게 될 피해는 치명적 수준에 이를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어 "관세 협상의 중요성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농민의 희생을 전제해서는 안 된다. 정부는 농업과 농민의 생존권을 철저히 지키겠다는 각오로 협상에 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회 차원의 대응도 이어지고 있다. 농해수위 소속 민주당 의원들은 지난 15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연 데 이어 18일에는 산업통상자원부와의 당정 간담회에서 농업계의 우려를 전달했다.
서삼석 민주당 의원은 현행 통상 방식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농축산업 주무부처인 농림축산식품부와 단 한 차례의 협의도 없이 통상 실무 협상이 진행되는 현실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서 의원은 산자부도 비판하며 "농축산물 관세 협상을 논의하기에 앞서 농사용 전기요금 인상 철회나 비료·농약 수입 가격 보장 대책은 세웠는지 되묻고 싶다"며 "통상교섭본부는 이제라도 '농업의 중요성이 각별한 만큼 농업과 농민의 문제를 직접 챙기겠다'는 이재명 대통령의 발언처럼 농축산 현장의견을 청취해 통상교섭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농수산위 소속 정종덕 진보당 의원은 지난 16일 국회 소통관에서 기자회견을 통해 "농업 희생을 지렛대 삼는 통상협상 시도를 즉각 중단하라"며 "누구도 외면할 수 없을 만큼 어려운 처지에 놓인 농업·농촌을 살리고 식량주권을 지키기 위해서는 여야가 초당적으로 협력해 나가자"고 말했다.
시민단체 "먹거리 안전 위협하는 관세협상, 기가 막힌다"
농민단체들은 반발은 더욱 거세다. 한국후계농업경영인중앙연합회(이하 한농연) 등의 농민 단체는 정부의 농축산물 시장 개방 반대를 요구하며 오는 25일과 28일 서울 용산구 대통령 관저 근처에서 상경 집회를 예고했다.
서용석 한농연 사무총장은 "쌀 부족을 겪고 있는 일본의 상황과 한국의 상황은 전혀 다르다"며 "과거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을 통해 이미 한국 농촌은 포기할 수 있는 부분을 과감히 포기했다"고 말했다.
서 사무총장은 "농촌 평균 연 소득이 1000만 원 수준인 상황에서 국내 농가들의 경쟁력을 전혀 고려하지 못한 채 일방적으로 개방을 논의하는 것은 속도와 방향 모두 옳지 않다"고 비판했다.
전국먹거리연대는 21일 성명을 통해 "산업통상자원부가 관세협상과 관련해 또다시 농업희생을 전제로 농축산물 개방이라는 전략적 판단을 할 것으로 보인다"며 "기가 막힐 노릇이다. 매년 심해지는 기후위기로 벼랑 끝에 몰린 농민들은 안중에도 없다"고 지적했다.
시민단체도 일방적으로 관세 협상 조건을 관철하려는 미국과 명확한 대응 방안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한국 정부를 비판하고 나섰다.
한국농축산연합회와 한국종합농업단체협의회, 축산관련단체협의회, 농민의길 등 농축산업 단체들은 지난 18일 용산 대통령실 앞에서 공동 기자회견을 열고 "농업인의 양해와 동의 없이 농축산물 관세, 비관세 장벽을 허문다면 절대 간과하지 않을 것"이라며 "대한민국 농업의 지속성 확보와 5천만 국민의 건강권 보장을 위해 투쟁에 나서겠다"고 강조했다.
349개 시민단체가 함께 결성한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도 "미국이 자동차, 반도체, 농축산 분야를 넘어 안보 문제까지 협상의 지렛대로 삼으려 하고 있다"며 "대한민국 주권을 위협하고 국제무역 통상 규범과 질서를 흔드는 압박을 중단할 것을 촉구한다"고 주장했다.
광주시민단체협의회 등 4개 시민단체도 "생존권을 지키기 위한 농업인의 처절한 몸부림이 마치 통상협상의 장애물인 양 여론몰이 중인 통상 당국의 태도는 누굴 위한 것인지 묻고 싶다"며 여한구 통상교섭본부장의 사퇴를 촉구했다.
한국농축산연합회도 지난 16일 성명서를 내고 "정부는 미국의 통상 압력에 굴복하지 말고 식량 주권과 국민 건강권을 사수하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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