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집자 주 = 한국국제교류재단(KF)의 지난해 발표에 따르면 세계 한류 팬은 약 2억2천500만명에 육박한다고 합니다. 또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초월해 지구 반대편과 동시에 소통하는 '디지털 실크로드' 시대도 열리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한류 4.0'의 시대입니다. 연합뉴스 동포다문화부 K컬처팀은 독자 여러분께 새로운 시선으로 한국 문화와 K컬처를 바라보는 데 도움이 되고자 전문가 칼럼 시리즈를 준비했습니다. 시리즈는 매주 게재하며 영문 한류 뉴스 사이트 K 바이브에서도 영문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배우 전도연과 박해수의 열연으로 화제를 모았던 연극 '벚꽃동산'이 오는 9월 홍콩, 11월 싱가포르 초청 공연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해외 투어에 나선다. LG아트센터가 제작하고 세계적인 연출가 사이먼 스톤이 연출한 이 작품은, 2024년 초연 당시 압도적인 반응을 얻었다.
객석 점유율 95%, 총 4만 명 관객 동원이라는 기록은 한국 연극계에 적지 않은 울림을 남겼다.
이번 해외 공연은 홍콩문화센터 대극장에서 열리는 '2025 홍콩 아시아플러스 페스티벌' 개막작으로 선정됐다. 이후 11월 싱가포르 에스플러네이드 공연을 거쳐 호주, 뉴욕 등지로 투어를 이어간다.
세계 공연 시장에서 한국 연극이 '로컬 콘텐츠'로 소비되는 것을 넘어, 동시대적 예술 담론의 한 축으로 자리매김하려는 움직임이 본격화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성취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그 뿌리에는 오랫동안 연극의 사회적 기능에 충실한 작품들이 존재해 왔다. 사회를 비추는 거울로서의 연극, 공동체를 치유하고 인간다운 삶을 탐구하는 예술로서의 연극이 있었기에 오늘날 K-씨어터의 가능성이 열리고 있다.
◇ 연극의 사회적 기능, 한국 연극의 힘
연극은 결코 오락을 위한 무대만이 아니다. 그것은 시대의 기록으로서 공동체의 목소리로서, 인간 존재를 성찰하게 한다. 연극은 공동체의 힘-관객의 연대감이든, 창작자의 협력이든-이 특별히 빛을 발하는 예술 장르다.
무엇보다 연극은 다양한 방식으로 사회에 의미 있는 영향을 미친다. 시대상을 반영하고 사회적 성찰을 유도하면서 사회적 부조리나 시대의 아픔을 무대 위로 불러와 관객에게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또한 연극은 공동체 의식을 회복시킨다. 배우와 관객이 동일한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며 만들어내는 현장성은 연극만의 독보적 힘이다. 무엇보다도 연극은 정서적 치유와 감정의 정화(카타르시스)를 제공한다. 억눌린 감정을 안전하게 풀어내고, 타인의 삶을 간접적으로 체험하게 한다.
연극은 교육적 가치도 크다. 희곡의 소재는 역사·윤리·문학 등 다양한 지식을 포함하고, 표현과 상상력을 확장한다. 이렇듯 연극은 예술성과 오락성을 결합하여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매력을 갖고 있다.
이러한 연극의 힘은 오늘날에도 변함없이 유효하다. 최근 창작집단 독의 '팬데믹 플레이'와 같은 작품은 연극이 지닌 사회적 의미와 공동체적 가치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 '팬데믹 플레이'가 남긴 울림
'팬데믹 플레이'는 9명의 작가 모임인 창작집단 독의 작품이다. 독의 작가들은 코로나19라는 전대미문의 상황을 각각 9개의 에피소드로 완성했고, 연출가는 이들 낱낱의 에피소드를 이어 붙여 패치워크를 하듯 의미 있는 하나의 작품을 완성해냈다.
결혼식 하객을 제한해야 하는 현실을 담은 '순대만 주세요', 마스크 뒤에 가려진 인간관계의 단절을 다룬 '새벽, 호모 마스쿠스', 조문객 없는 장례식을 그린 '빈소' 등 각 에피소드는 팬데믹 시대의 상처를 구체적으로 기록한다.
특히 '파인다이닝' 에피소드가 돋보였는데, 작가의 감각적인 필력과 깊이 있는 서사가 앞뒤에 놓인 에피소드까지 단단하게 이어주는 듯했다.
'팬데믹 플레이'는 '말맛'이 살아 있는 연극이다. 시처럼 여러 겹의 층위를 가진 단어와 문장들이 관객의 귀를 사로잡는다. 최근 연극 작품들 가운데에서는 보기 드문 '듣는 재미'를 안겨주는 연극이어서, 짧지 않은 공연 시간에도 불구하고 보는 내내 기분 좋은 긴장감이 유지됐다.
연출 방식도 흥미롭다. 연작이 아닌 각각의 에피소드를 마치 연작처럼 연결되도록 애쓴 흔적이 역력했다. 다소 억지스럽게 느껴지는 부분이 없지 않았으나 관객에게는 퍼즐 맞추듯 각 에피소드를 조합해 가는 재미도 적지 않았다. 연출가가 창작집단 독이 가진 공동 창작의 장점을 작품으로 드러내기 위해 노력한 부분은 새로운 방식의 실험이고, 성공적이라고 보인다.
연극작가 이상우(한예종 교수)는 '팬데믹 플레이' 희곡집에서 창작집단 독의 이런 제작 방식에 대해 "예술이라면, 새로운 것은 언제나 옳다. 옳을 수밖에 없다. 창작집단 독은 처음부터 새로웠다. 지금도 여전히 새롭고 앞으로도 새로울 것이라 기대한다. 연극이라는 우주로 탐험을 나서려는 빛나는 우주인 후보들에게 이만한 안내서가 없을 거라 생각한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 배우들이 빚어낸 앙상블
무엇보다 배우들의 연기력이 작품의 설득력을 높였다. 그중 김동률과 김세영의 연기는 단연 눈부셨다. 김동률은 탄탄한 기본기와 세밀한 화술로 대사의 설득력을 극대화했다. 작은 동작 하나에도 의미가 스며 있어 관객을 깊이 몰입하게 했다. 김세영은 담백하고 절제된 연기를 선보이며, 감정을 강요하지 않는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앞으로 더욱 주목할 만한 배우다.
다중 역할을 소화하는 배우들의 앙상블 역시 훌륭했다. 같은 배우가 서로 다른 캐릭터를 연기했음에도 어색함이 없었고, 에피소드 사이의 연결성을 높여주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 점은 '팬데믹 플레이'가 '협업의 미학'을 잘 보여준 작품임을 증명했다.
작품을 관람한 후 기립박수를 보낸 배우 안석환은 "새로웠고 (열심히 해주는 후배들에게) 고마웠다. 연극인의 협업력을 만천하에 증명한 작품이라 더욱 고마웠다. 제작자로서 참여해 함께 다시 한번 더 많은 관객에게 선보이고 싶다"고 말했다.
'팬데믹 플레이'는 또한 사회적 담론만을 담지 않고 "연극이 왜 여전히 필요한가?"라는 본질적 질문에 대해 설득력 있는 해답을 제시했다. 관객은 이 작품을 보며 그 시절의 두려움과 고립, 상실을 다시 마주하지만, 동시에 인간다운 삶과 연대의 가치를 다시 확인했다. 연극은 이렇게 관객이 과거를 성찰하고 미래를 준비하도록 돕는다.
필자는 이런 작품들이 쌓였기에 '벚꽃동산'의 해외 진출과 K-씨어터가 세계화할 수 있었다고 본다. 한국 연극은 이제 세계와 담론을 나누는 예술로 자리 잡았다. 특히 '팬데믹 플레이'는 한국 연극이 사회적 예술로서 얼마나 성숙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다.
'팬데믹 플레이'는 연극의 사회적 기능, 시대의 기록, 공동체의 치유, 인간다움의 탐구 등 요소를 설득력 있게 보여준 작품이다. 말맛이 살아 있는 대사, 퍼즐 같은 연작 연출, 배우들의 탁월한 앙상블, 그리고 협업의 힘이 어우러져 한국 연극의 저력을 고스란히 보여줬다.
K-씨어터가 세계로 뻗어나갈 수 있는 든든한 뿌리다.
김수미 연극 평론가
▲ 전 월간 '객석' 연극전문 기자. 현 중랑문화재단 문화정책사업팀장
<정리 : 이세영 기자>
seva@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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