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한 줄 평
“좁은 공간을 열어 세상과 존재를 들이고, 사계를 주유해 사랑과 허위를 눙치고 있다.”
▲시 한 편
<밤비> - 유기택
먼 동네 불빛도 다 젖었구나
마을버스는
집 앞 정거장을 지나쳐
허겁지겁 나를 내려놓고
골난 뚝지처럼 가버렸다
오버 주류와 태그 사이
열정과 냉정의 그 사이
어정쩡히 웅크린 검은 숲은
줄기찬 빗소리에 축 처지고
지지부진하던 소식은 끊겼다
잘 살아
비는 그칠 줄 모르고
마을을 돌던 버스도 끊어졌다
▲시평
전체적인 시 분위기가 왠지 외롭고 쓸쓸하다. 시인은 막차를 타고 귀가하다가 “먼 동네 불빛”에 취해 내릴 곳을 지나친다. 지나친 감상에 젖어 잠시 현실을 잊은 듯하다. 아마도 시내에 나가 지인(들)을 만나 한잔해서 취기와 술자리의 여운에 잠시 딴생각을 했을 것이다. 조금만 방심해도 현실은 곁길이나 뒷길로 삶을 인도한다. 가끔 덫을 놓고 기다리기도 한다. 허방에 빠져 “허겁지겁”하는 삶에 미소 짓기도 한다. 황급히 마을버스에서 내린 시인은 삶은 야구 경기 같다고 생각한다. 한 정거장 지나친 것은 오버 주루, 막차를 타고 귀가한 것은 세입, 한밤 취중의 귀가는 태그 아웃이다. 한데 안타를 치고 오버런으로 죽어 홈으로 돌아가는 기분이다. 오버 주루의 오버(over)는 지나친, 주루는 주류(酒類)를, 즉 지나친 음주로 한 정거장 지나친 것을 뜻한다. “열정과 냉정”은 술자리에서의 열정과 마을버스에서 내린 후의 냉정이다. 술자리에서 ‘왜 말을 많이 했을까, 말하기보다 들어줄 걸’ 후회도 묻어난다. 비 내리는 어두운 밤거리를 걷다 보니 “검은 숲”이 눈에 들어온다. “먼 동네”의 불빛에서 바로 곁의 불빛 없는 “검은 숲”의 시선이 옮겨가자 비로소 내 몰골이 눈에 들어온다. 전자가 타지/이상이라면, 후자는 고향/현실이다. 그사이에 시인이 서 있다. 한밤, 취중, 폭우, 밤길, 혼자… 거기에 비는 줄기차게 내리고, 발걸음은 축 처졌다. 감상에 젖기 딱 좋은 분위기다. 시인은 그 길을 같이 걸었을, 한때 친했던 사람을 생각한다. 아무리 친했던 사람도 만나지 않으면 멀어진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 “잘 살아” 시인은 짧게 중얼거린다. 그 말도 허공에서 빗줄기에 씻겨 내린다. 영원한 건 없다. 돌고, 흐르고, 부서져 변화한다. 사람의 관계는 특히 더 그렇다. 다 끊겨 사라진다. (김정수 시인)
▲김정수 시인은…
1990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했다. 시집 『사과의 잠』 『홀연, 선잠』 『하늘로 가는 혀』 『서랍 속의 사막』과 평론집 『연민의 시학』을 냈다. 경희문학상과 사이펀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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