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떤 책은 몇 개의 문장만으로도 큰 감동을 선사하고 알찬 정보를 제공합니다. ‘책 속 명문장’ 코너는 그러한 문장들을 위해 마련한 공간입니다. |
애인을 사귀기 전에는, 진짜 이 사람이 날 사랑해주면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할 것 같았다. 근데 사실, 그것을 이루면 행복하겠지 하고 상상하는 순간이 가장 행복했다. 꿈을 이루는 것보다 꿈을 품는 게 더 행복했다는 말이다. 어쨌든 내 꿈은 행복해지는 거다. - 「엘리」 <118쪽>
실장은 사무실 안쪽에 사방이 통유리로 된 자기만의 방을 갖고 있는데, (…) 아무도 통유리 바로 앞에는 앉지 않으려고 했다. 그 자리는 실장에게 등과 뒤통수를 무방비로 드러내는 곳이니까. 아무리 아프고 졸려도 엎드려 잘 수 없고, 틈틈이 웹서핑을 하거나 웹툰을 볼 수도 없는 자리. 실장이 궁금해하는 것은 사원의 표정이나 안색이 아니라 그 사원의 컴퓨터 화면이다. 자리의 주인은 실장을 전혀 볼 수 없지만, 실장은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낱낱이 볼 수 있기에 모두들 기피하는 자리.
그곳이 내 자리다. - 「창」 <145쪽>
다른 직원에 비해 턱없이 적은 월급을 받을 때마다 이십사개월이나 삼십육개월 할부로 내 청춘과 인격을 팔아넘긴 기분이지만, 별수 없다. 청춘과 인격이 밥 먹여주는 건 아니니까. - 「창」 <147쪽>
공개하는 불행은 진짜 불행이 아니다.
내가 왕따 처지를 인터넷에 공개하지 않는 것처럼. - 「창」 <161쪽>
옛 애인 중엔 사랑한다는 말보다 헤어지자는 말을 먼저 한 사람도 있다. 지긋지긋하니까 이제 그만 헤어지자는 사람 앞에서 나는, 헤어지려면 우선 사랑한다는 말부터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따졌다.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으면 절대 헤어질 수 없다고 길길이 날뛰자 그 사람은 적선하듯,
그래, 그거 했다. 됐냐?
라는 말을 던지고는 바로 자리를 떴다. 나는 그를 쫓아가 그의 입에서 끝내 ‘사랑’이란 단어를 뽑아내고야 말았다. 그런식으로 복수했다. 그는 아마 ‘사랑’이란 단어에 알레르기가 생겼을 것이다. 누군가에게 사랑을 고백할 때마다 사랑한다고 말하라며 표독하게 쫓아다니던 내가 떠오르겠지. - 「첫사랑」 <177쪽>
나는 내가 방을 떠날 날을 헤아려보았다. 당장이 될 수도 있고, 영영 오지 않을 수도 있는 날이었다. 아무 균형도 규칙도 없는 그곳에서 나는 세상에서 가장 평화롭고 따뜻한 품을 느끼며, 다시는 깨지 않을 사람처럼 잠을 자고 잠을 자고, 잠을 잤다. - 「팽이」 <233쪽>
그렇다면 세상은 조금 아름다워질 것이다. 지구, 한국, 사람들이 사는 세상, 그런 거 말고.
내 세상.
내 세상 말이다.
바깥세상에는 관심 없다. 그까짓 것. 세상이 다 망해버려도 월드빌 401호, 내가 있는 이곳만 안전하다면 종말이, 전쟁이, 대학살이 뭔 대수인가. 바깥세상도 내가 굶든, 죽든, 다리부터 서서히 플라스틱으로 굳어가든 관심 없긴 마찬가지 아닌가. - 「월드빌 401호」 <272쪽>
나는 내 세계를 지키고 싶었다. 하지만 내 세계엔 도대체 뭐가 있나. - 「월드빌 401호」 <292쪽>
『팽이』 (리마스터판) 최진영 지음 | 창비 펴냄 | 356쪽 | 18,000원
[정리=유청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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