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락] 재계에 또다시 '빅딜' 바람이 불고 있다.
최근 석유화학업계 대표기업인 롯데케미컬과 HD현대의 대형 인수합병(M&A) 소식이 들려오면서 시장은 물론 투자가들의 시선이 집중되고 있다.
업계에서는 장기화된 경기 침체와 글로벌 공급망 재편 여파로 극심한 불황에 빠진 상황에서 나온 생존을 위한 '마지막 카드'로 해석하고 있다.
실제로 우리나라 재계는 위기 상황에서 예상치 못한 대형 딜로 활로를 열어온 역사가 있다.
방산업계를 둘러싼 삼성과 한화 간 빅딜, SK의 하이닉스 인수, 현대차그룹의 계열사 통폐합 등이 모두 경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결단이었다.
문제는 현재 M&A 시장 환경이 과거보다 훨씬 까다로워졌다는 점이다.
고금리에 따른 높은 자금조달 비용과 강화된 규제가 대형 딜 성사를 어렵게 만들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도 전문가들은 기업들의 포트폴리오 재편 압박이 커지면서 하반기 M&A 시장이 서서히 살아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뉴스락>뉴스락>은 재계 빅딜의 역사를 되짚어보고, 변화하는 경영환경 속에서 기업들의 생존 전략과 하반기 M&A 시장 전망을 살펴본다.
한국 재계 '빅딜 신화'의 변천사
1998년 외환위기를 기점으로 시작된 재계의 빅딜이 27년간 규모와 성격 모두 극적으로 변화했다.
정부 주도의 강제적 구조조정에서 기업 주도의 글로벌 성장 전략으로 완전히 탈바꿈한 것이다.
한국 재계에 '빅딜'이라는 용어가 등장한 것은 1998년 외환위기 때였다.
김대중 정부는 5대 그룹(현대·삼성·대우·LG·SK)에 대규모 사업 교환을 공개적으로 압박했다.
정부의 압박은 가혹했다. 금융당국은 빅딜에 유보적인 기업들에게 여신 대출 중단을 경고하며 사실상 강제했다.
이런 압박 하에 현대전자의 LG반도체 인수, 현대자동차의 기아자동차 인수 등이 성사됐다.
하지만 정부 주도 빅딜의 부작용도 컸다. 삼성과 대우 간 자동차·전자사업 맞교환이 추진됐지만 결국 실패하며 대우그룹 해체의 단초가 됐다.
1999년 현대전자가 파산하고, 2001년 현대정유가 법정관리에 들어가는 등 실패 사례가 잇따랐다.
2000년대 들어 빅딜의 성격이 근본적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대표적 사례가 SK의 하이닉스반도체 인수(2012년)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2012년부터 반도체 관련 인수합병과 투자에만 17조원을 투입했다.
위태로운 상황의 하이닉스를 인수해 SK그룹 최대 매출 계열사로 키워낸 것은 "SK그룹 역사상 최고의 인수합병 사례"로 평가받는다.
실제로 SK하이닉스는 2024년 21조3300억원의 영업이익을 기록해 SK그룹이 삼성을 제치고 영업이익 1위에 오르는 원동력이 됐다.
포스코의 대우인터내셔널 인수(2010년), 현대중공업의 대우조선해양 인수(2019년) 등도 같은 맥락에서 이뤄진 전략적 인수였다.
이들 거래는 모두 정책금융기관 관리하의 부실기업을 대기업이 인수하는 구조였지만, 기업의 자발적 판단이 작용했다.
2020년대 들어서는 글로벌 진출을 위한 빅딜이 본격화됐다.
SK하이닉스의 인텔 낸드사업 인수는 총 88억5000만달러(약 11조원) 규모로 국내 기업의 글로벌 진출 이정표가 됐다.
한화그룹도 미국 방산업체 인수를 통해 글로벌 방산 강자로 발돋움했다. 삼성전자 역시 독일 플랙트그룹 인수 등 해외 기업 M&A에 적극 나서고 있다
정민계 동국대학교 법무대학원 주임교수는 <뉴스락> 과의 통화에서 뉴스락> "1998년 외환위기 당시 이른바 '빅딜 정책'은 정부가 주도한 생존형 구조조정이었다"며 "반면 지금의 M&A는 철저히 기업이 시장 기반의 전략적 판단에 따라 주도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정 교수는 "정부 주도의 구조조정이 '위기 대응'이라면, 기업 주도의 M&A는 '성장 기획'"이라며 "이 패러다임 전환이 한국 기업의 글로벌 확장성과 기술 리더십을 높이는 계기가 됐다"고 평가했다.
실제로 현재 기업들은 단기 실적보다 장기 경쟁력 확보를 위해 빅딜을 활용하고 있으며, 특히 AI와 반도체 등 미래 먹거리 확보에 집중하고 있다. 과거 정부 주도의 '어쩔 수 없는 선택'에서 기업의 '적극적 전략'으로 바뀐 셈이다.
정 교수는 "성공적인 M&A의 핵심은 철저한 사전 조사와 계획"이라며 "기업 가치를 정확하게 평가하고, 양측의 전략적 목표와 시너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2025 하반기 M&A 격전지
국내 M&A 시장이 3년 만에 본격적인 회복세를 보이며 올 하반기 '빅딜 러시'가 예고되고 있다.
하반기에는 석유화학·철강 업계를 중심으로 한 대형 구조조정이 본격화될 전망이다.
삼일PwC경영연구원에 따르면 2025년 M&A 시장은 3년간 지속된 침체 국면을 지나 하반기로 갈수록 거래 회복세가 점진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미·중 무역 마찰과 지정학적 불확실성, 고금리 기조 등 불확실성이 여전하지만, 기업들은 비핵심 자산 매각과 핵심 사업 강화를 동시에 추진하며 적극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다.
삼성전자는 5월 중순 유럽 최대 공조기기 제조사인 독일 플랙트그룹을 약 2조4천억원에 인수했다. 8년 만의 조단위 M&A로 중앙공조 시장 공백을 메우고 데이터센터 공조 수요를 선점하겠다는 전략이다.
이어 같은 달 미국 마시모의 오디오 사업부를 3억5천만달러에 인수하며 차량용·고급 오디오 시장 진입을 가속화했다.
SK㈜는 지난 3월 자회사 SK스페셜티 지분 85%를 한앤컴퍼니에 약 2조7천억원에 매각했다.
반도체·디스플레이용 특수가스 생산 1위 기업을 넘기며 확보한 자금은 AI·에너지솔루션 등 미래 성장동력에 재투자한다는 전략이다.
항공업계에서는 오랜 숙원 사업들이 결실을 맺었다. 대명소노그룹은 예림당으로부터 티웨이홀딩스 지분 46.26%를 2500억원에 인수해 티웨이항공 경영권(54.79%)을 확보했다.
14년 만의 항공업 진출로 리조트와 연계한 통합 패키지 사업을 꾀한다는 계획이다.
타이어뱅크 그룹은 AP홀딩스를 통해 에어프레미아 지분 70% 이상을 확보, 신규 기재 도입과 M&A를 통한 규모의 경제 실현을 추진 중이다.
하반기에는 중국발 공급 과잉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석유화학·철강 업계를 중심으로 대형 구조조정이 본격화될 전망이다.
롯데케미칼과 HD현대는 충남 대산 석유화학단지 내 나프타분해설비(NCC) 통합을 검토 중이다.
롯데케미칼 측 설비를 HD현대케미칼로 이관하고 HD현대오일뱅크가 추가 출자하는 구조가 유력하지만, 양사의 자산 가치 평가에서 이견을 보이고 있다.
LG화학은 워터솔루션 사업부를 글랜우드PE에 1조3천억원에 매각하는 협상을 진행 중이다.
2014년 미국 나노H2O 인수를 통해 확보한 역삼투막 사업부로 글로벌 2위 사업자까지 성장했지만, 석유화학 본업 부진으로 비핵심 사업 정리에 나선 것이다.
포스코그룹 역시 중국·베트남 소재 저수익 자회사들을 대거 매각하며 현금 확보에 나서고 있다.
중국 쑤저우포항과기유한공사와 베트남 포스코이앤씨 등이 매각 대상이다. 지난해 120여개 자산을 정리해 6천625억원을 확보한 데 이어 올해도 대규모 구조조정을 이어갈 방침이다.
이 밖에도 철강 업계 라이벌 간 ‘동맹’도 눈길을 끈다. 포스코와 현대제철은 미국 루이지애나 전기로 제철소 프로젝트에 공동 투자하기로 검토 중이다.
업계 관계자는 "불확실한 대외환경에 대처하기 위한 선제적 대응이 절실한 시점"이라며 "산업별 사업 구조 개편을 통한 경쟁력 강화가 지속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조 단위 '빅딜' 줄줄이 대기
올해 하반기 국내 M&A 시장에 조 단위 ‘빅딜’이 연이어 예고되면서 거래 본격화 조짐이 뚜렷하다.
투자은행(IB) 업계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M&A 시장 전체 거래 규모는 35조6734억원을 기록해 전년 대비 16% 증가했다.
이 같은 회복세가 올해까지 지속되며 시장 규모가 37조원대에 달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한국M&A종합연구소 관계자는 "조 단위 매물이 나와있고, 사모펀드와 기업들이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찾기 위해 기회를 보고 있어 시장에 활기가 돌 것"이라고 설명했다.
M&A 시장 부활에는 정부의 전방위적 지원책이 뒷받침되고 있다.
이재명 정부는 지난 6월 대기업 총수들과의 간담회에서 "기업이 경제 미래의 핵심"이라며 적극적 지원 의지를 표명한 바 있다.
공정거래위원회는 M&A 심사 절차 간소화를 추진하고 있다. 2022년 기업결합 신고 면제 범위를 확대해 심사 대상을 40% 가까이 줄였으며, 계열회사 간 M&A와 사모펀드 설립 등을 신고 면제 대상에 포함했다.
중소벤처기업부도 올해 M&A 활성화 지원사업을 대폭 확대했다. 매각 기업의 기업가치평가 비용을 중소기업은 40%(최대 1500만원), 스타트업은 60%(최대 2000만원)까지 지원하는 방안을 시행하고 있다.
업계 전문가들은 이번 M&A 붐이 질적 변화를 동반할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정민계 동국대학교 법무대학원 주임교수는 "'비핵심 매각 + 전략적 인수 + 해외 확장'의 기조가 될 것"이라며 "AI, 반도체 등 신성장 분야 중심의 집중 투자형 M&A가 증가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정 교수는 "전략적 투자자와 사모펀드의 공동 투자 모델이 활성화되면서 대형 딜 성사가 늘어날 것"이라고 밝혔다.
특히 전략적 투자자와 사모펀드의 공동 투자 모델 활성화로 대형 딜 성사가 늘어날 것으로 분석됐다.
맥킨지 연구에 따르면 연평균 5건 이상의 M&A를 진행하는 기업들이 선별적 M&A 기업보다 두 배 빠른 성장률을 보이며, 건당 인수 비용도 38% 저렴한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토지 이전 과세, 공정거래·환경 규제 등 복잡한 관료 절차는 여전히 빅딜의 발목을 잡고 있다.
이에 정부는 지주회사 지분 100% 취득 유예기간을 기존 3년에서 5년으로 연장하고, 공정거래위원회와의 M&A 심사 간소화에 나서고 있다.
정 교수는 "한국 기업은 이제 M&A를 '수단'이 아닌 '전략 그 자체'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며 "정부의 유연한 제도 마련과 기업의 정밀한 전략이 결합된다면, 한국이 글로벌 M&A 허브로 도약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이어 "M&A는 제도·자본·인재·정보 인프라가 동시에 작동해야 하는 종합 시스템"이라고 강조했다.
Copyright ⓒ 뉴스락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본 콘텐츠는 뉴스픽 파트너스에서 공유된 콘텐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