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떤 책은 몇 개의 문장만으로도 큰 감동을 선사하고 알찬 정보를 제공합니다. ‘책 속 명문장’ 코너는 그러한 문장들을 위해 마련한 공간입니다. |
이세돌 9단과 알파고의 1국 결과는 다들 알다시피 이 9단의 불계패[바둑을 끝까지 두지 않고 대국자가 스스로 패배를 인정하는 것]였다. 데미스 허사비스 구글 딥마인드 CEO는 알파고의 승리를 달 착륙에 비유했고 사람들은 충격에 휩싸였다. 특히 한국 바둑계는 공황에 가까운 분위기였다. <12쪽>
3월 10일 아침에 신문기자가 내게 전화를 건 이유도 그래서였다. 기자는 내게 ‘소설가가 본 알파고’라는 주제로 칼럼을 부탁했다. 나는 망설이다 거절했다. 그즈음 언론에서 요청하는 각종 논평을 피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것이 중요한 사건이라는 사실은 알았지만,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는 알지 못했다. 앞으로 어떤 세상이 펼쳐지게 될까? <12쪽>
‘위대함’이라는 개념 자체가 희소성과 관련이 있는 것일까? 한 작품이 독자에게 너무나 큰 감명을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와 비슷한 작품이 매일 288편씩 쏟아진다면 위대함이 사라진다는 말일까?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하루에 288번씩 감동할 수 없다. 매일 여덟 번씩 감동하는 것조차 과한 일이다. <15쪽>
소설 쓰는 인공지능이 문학에 가치를 두지 않는다면, 문학 창작은 창작자의 내면과 별 관련이 없다는 얘기가 된다. 그런 때 내가 소설을 여전히 내 일로 여길 수 있을까? 창작자의 내면과 별 관련이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 문학에 헌신하기는 어렵다. 소설 쓰는 인공지능이 문학에 가치를 둔다면, 그래서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경지로 문학을 끌어올린다면, 그런 때 내가 소설을 여전히 내 일로 여길 수 있을까? <17쪽>
바둑 AI 프로그램이 제시하는 새로운 포석을 프로기사들은 ‘AI 포석’이라고 불렀다. 그 포석을 최대한 능숙하게 구사하는 것이 랭킹을 끌어올리는 지름길이었다. 과거에 배운 내용을 고집하며 AI 포석을 거부한 기사들은 순위권에서 멀어졌다. 얼마 지나자 정상급 기사 중에서 인공지능을 사용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젊은 기사들은 AI 포석을 열심히 공부하고 초반 30~50수가량을 암기해서 뒀다. 모든 기사가 바둑을 비슷하게 두게 되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20쪽>
그 일을 인간보다 잘하지 않아도, 인간과 비슷한 수준으로 하기만 해도 작업 속도만 빠르다면(빠를 테지) 각광받으며 보급될 것이다. 그때 우리는 ‘문학’과 ‘작품’의 정의를 바꾸게 될 것이다. <24쪽>
나는 바둑계에 미래가 먼저 왔다고 생각한다. 2016년부터 몇 년간 바둑계에서 벌어진 일들이 앞으로 여러 업계에서 벌어질 것이다. 사람들이 거기에 어떤 가치가 있다고 믿으며 수십 년의 시간을 들여 헌신한 일을 더 잘해내는 인공지능이 어느 순간 갑자기 등장하는 것. 그 인공지능이 싼 가격에 보급되는 것. 그 인공지능과의 ‘공존’을 강요당하는 것. 인공지능이 만드는 새로운 질서를 따라야 하는 것. 당신이 알던 개념을 인공지능이 재정의하고, 당신은 그것을 다시 배워야 하는 것. 인공지능은 타자기나 워드프로세서와는 다르다. <25~26쪽>
알파고는 바둑을 제대로 둔 것이었고, 인간 기사들이 그걸 이해하지 못한 것뿐이었다. 인공지능은 사람이 제대로 바라볼 수도 없을 정도로 까마득히 높은 위치에 있었다. 이때부터 프로기사들 사이에서 ‘알파고가 바둑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 것 같다’라는 말이 오가기 시작했다. 이세돌 9단은 알파고와 다섯 번의 대국을 마친 뒤 “인간의 창의력, 바둑 격언, 기존의 수법에 대해 의문이 들었다.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었던 것이 정말 맞는가”라고 말했다. <38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말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아무튼 심오한 게 문학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기계는 그런 걸 구현할 수 없다’라고 자신 있게 주장할 수는 없다. 소설을 쓰는 데 필요한 게 창의성이든 문학성이든 뭐든 간에, 그걸 인간만 가질 수 있다고 말할 근거는 아무것도 없다. 알파고가 주는 교훈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가 막연하게 ‘그건 불가능할 거야’라고 생각한다고 해서 실제로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불가능한 것은 매우 적다. <47쪽>
『먼저 온 미래』
장강명 지음 | 동아시아 펴냄 | 368쪽 | 20,000원
[정리=이자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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