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컬처 이준섭 기자] 왕관을 쓴 이들의 시대는 끝났다고 믿었던 적이 있었다. 18세기 말 프랑스혁명의 함성과 함께 목이 잘려나간 왕과 여왕, 시민이 직접 권력을 손에 쥔 공화국의 탄생은 그렇게 인류 역사 속에서 군주제의 종언을 선언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21세기 오늘에도, 세계 곳곳에는 여전히 왕과 황제가 존재한다. 비록 더 이상 직접 통치하지는 않더라도, 그들의 존재는 아직도 많은 나라에서 국가 정체성의 일부로 남아 있다.
특히 현대 군주제는 두 가지 갈래로 나뉜다. 실질적인 통치 권력을 행사하는 ‘전제군주제’와, 국가의 원수로서 주로 상징적인 역할만을 수행하는 ‘입헌군주제’가 그것이다. 두 체제는 서로 전혀 다른 시대적 배경과 역사적 맥락 위에 서 있다.
먼저, 전제군주제는 과거 절대왕정의 연장선에 있다. 고대와 중세, 심지어 근대 초기까지도 왕은 국가 그 자체였다. “짐이 곧 국가다”라고 선언한 프랑스의 루이 14세는 전제군주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이다. 입법과 사법, 행정과 군사에 이르기까지 모든 권력은 왕에게 집중되었고, 백성은 단지 신민(臣民)이었을 뿐이었다.
이러한 전제군주제는 근대 민주주의가 자리 잡으면서 대부분의 국가에서 폐지되거나 입헌군주제로 전환되었다. 하지만 예외도 있다. 오늘날까지 전제군주제를 유지하고 있는 국가는 전 세계에서 단 6곳에 불과하다. 대표적인 예가 사우디아라비아다. 이슬람 율법인 샤리아를 기반으로 한 절대왕정 국가로, 국왕은 총리직을 겸임하며 국가의 입법·사법·행정권을 모두 행사한다. 정치적 반대 세력은 철저히 억제되며, 표현의 자유는 엄격하게 통제된다. 석유 자원을 기반으로 한 부의 집중은 국왕의 권위를 더욱 공고히 하지만, 그 이면엔 인권 문제와 내부 개혁에 대한 요구가 잠재되어 있다.
비슷한 구조는 브루나이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오일머니로 번영을 구가하는 이 소국의 술탄은 전 세계에서 가장 오래 재위 중인 군주다. 모든 행정 권한을 손에 쥔 그는 최근까지도 동성애 처벌 등 이슬람 율법 강화 정책을 고수해 국제사회의 비판을 받아왔다. 에스와티니(구 스와질랜드) 역시 국왕이 정당 활동을 금지하고, 국가 정책을 독점하는 아프리카 유일의 전제군주국이다. 이처럼 전제군주제는 아직 일부 지역에서 살아 있지만, 정치적 자유와 민주주의 가치라는 보편적 기준과는 거리가 먼 체제다.
반면, 대부분의 군주국은 정치 권한을 제한하고, 헌법과 의회 중심의 정치를 운영하는 입헌군주제로 이행했다. 그 시초는 영국에서 시작됐다. 1215년, 존 왕이 귀족들의 압력에 굴복해 서명한 ‘마그나카르타’는 왕권을 제한하고 법치의 원칙을 명문화한 인류 최초의 문서 중 하나였다. 그리고 1688년, 명예혁명을 통해 의회는 왕의 통치 권한을 박탈하고 입헌군주제로의 전환을 완성했다. 그 결과 1689년 제정된 ‘권리장전’은 오늘날 영국 입헌군주제의 헌법적 근간이 되었다.
이후 영국은 군주를 국가의 상징으로 남기되, 정치에는 개입하지 못하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왔다. 찰스 3세의 어머니인 엘리자베스 2세 역시 재위 중 단 한 번도 정치적 견해를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19년 브렉시트 국면에서 벌어진 ‘의회 정회 사태’는 입헌군주제의 한계를 드러냈다. 보리스 존슨 총리가 정치적 유불리를 위해 여왕에게 의회 중단을 요청했고, 여왕은 이를 승인했다. 훗날 대법원이 이를 위헌으로 판결했지만, 통치하지 않는 군주가 정치적 상황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논란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입헌군주제는 영국 외에도 다양한 나라에서 각기 다른 형태로 운영되고 있다. 일본의 천황은 헌법에 의해 ‘국민 통합의 상징’으로 명시되어 있으며, 모든 국정 행위는 내각의 조언과 승인 하에 이뤄진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은 군국주의 청산과 함께 왕권을 완전히 정치에서 분리시켰다.
스웨덴은 1974년 헌법 개정을 통해 국왕의 모든 정치 권한을 제거하고 상징적 존재로 전환했으며, 국왕은 단지 국가 행사나 외교적 접견만을 수행한다. 네덜란드와 노르웨이, 덴마크 역시 유사한 형태의 입헌군주제를 운영하고 있으며, 군주의 역할은 국민 통합과 역사적 전통의 보존에 국한된다. 특히 최근에는 군주제 유지에 따른 국민 부담, 세금 문제 등이 제기되며 왕실의 재정 공개나 활동 축소 등 자정 노력이 요구되고 있다.
그렇다면 군주제는 오늘날 왜 여전히 존재하는가. 일부에서는 군주는 정쟁에서 자유로운 ‘국가의 얼굴’로서, 정치적 혼란 속에서도 안정감을 주는 상징이라 말한다. 그러나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은 군주제가 과연 민주주의 사회에 적합한 제도인지 회의적인 시선을 보낸다. 2023년 조사에 따르면, 영국의 18~24세 중 단 30%만이 왕실의 존속을 지지했다. 특히 젊은 세대일수록 전통보다는 평등과 개방, 투명성을 중시하는 경향이 뚜렷하다.
찰스 3세의 즉위 이후, 영국 왕실은 '슬림 모나키(Slim Monarchy)'를 내세우며 군주의 규모를 축소하고 현대적 역할을 모색하려 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왕실의 존재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은 남는다. ‘군주는 통치하지 않지만 정치의 그림자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는가’, ‘왕실은 국가 정체성의 상징인가, 시대착오적 제도인가’라는 질문은 입헌이든 전제이든 모든 군주제가 피할 수 없는 고민이다.
오늘날 군주제는 과거의 영광을 등에 지고 현재를 살아가고 있다. 그것이 여전히 유효한 전통인지, 아니면 이제는 내려놓아야 할 상징인지에 대한 판단은 결국 국민들의 몫이다.
뉴스컬처 이준섭 rhees@knewscor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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