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실하게 쌓아 올린 시간의 밀도, 차정숙 화백이 부르는 ‘내 마음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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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실하게 쌓아 올린 시간의 밀도, 차정숙 화백이 부르는 ‘내 마음의 노래’

독서신문 2025-06-27 06:00:00 신고

차정숙 화백

“그전에는 ‘꿈꾸는 세상’이라는 제목으로 계속 전시했는데 누군가 그랬어요. 이제 꿈 그만 꾸고 (꿈에서) 빨리 나오라고. (웃음) 다른 제목을 정하려 해도 마땅한 게 없는 거야. 그러다 문득 ‘내 마음의 노래’란 말이 떠올랐어요. 살면서 나를 표현해 나가는 작업이니까. 그림이 나의 역사잖아요.”

초등학교 때부터 계속 그렸다.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을 다니던 시절 전공은 디자인. 그때도 전시는 했으나 화가의 길에 들어서게 된 건 졸업 이후다. 고등학교 3학년까지도 미술반에서 그림을 그렸건만 회화에 본격적으로 접근하는 게 그렇게 쉽지는 않았다고. 판화로 눈을 돌린 적도 있지만, 결국 귀향하듯 그림으로 돌아왔다.

지금까지 50여 회의 개인전을 이어오면서 2011년 무렵이 차정숙 화백의 작품세계에서는 전환점이 되었던 시기다. ‘내 마음의 노래’ 시리즈를 그렸고, 동명으로 개인전을 열기를 반복했다.

Q. 뭉뚱그려서 말하기 어려울 수도 있지만, 화백님께 그림이란 어떤 마음의 노래라고 생각하시는지요.

희로애락이 다 들어 있지 않을까요? 그렇지만 가급적 행복한 그림을 그리고 싶고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싶어요. 저는 감정적으로 힘들 때, 드라마 최종회를 봐요. 우리나라 드라마는 항상 해피엔딩이에요. 그게 감정에 많이 도움이 되더라고. 모든 것이 어쨌든 긍정적으로 끝난다, 하는 기운을 받는 거죠. 행복한 기운을.

Q. 서사를 모르고 있는데 마지막 화만 봐도 이해가 되나요? 해피엔딩이라는 것을요.

감정적으로 서로 교류가 되잖아요. 끝만 봐도 알아요. 뒤죽박죽 하던 내용도 맨 끝에는 정리가 돼서 아름답게 끝나더라고요.

파주의 작업실 외벽에 설치된 작품

Q. 화가로 살아야겠다, 결심하신 건 언제예요?

대학교 때부터 아르바이트를 많이 했어요. 제가 시골에서 왔거든요. 돈을 벌어야 되잖아요.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은 항상 그림을 그리리라는 생각이 있었고, 다른 데서라도 벌어서 그림을 그리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주로 가르치는 일을 했죠. 지금도 가르치고 있고요. 대가들은 괜찮을 수도 있지만, 화가가 작품을 팔아 먹고 산다는 건 사실 힘들거든요.

Q. 가르칠 때 제자들에게 강조하는 것이 있나요? 그림을 대하는 자세라든지요.

열심히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고 꾸준히 하는 게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해요. 확 불붙는 열심이라는 것은 금방 꺼지기도 하거든요. “일주일에 한 번이면 한 번만 빠지지 말고 나오고, 집에서 열심히 하려고 하지 말라”고 하죠. 틱낫한 스님이 그러셨잖아요. 설거지를 할 때는 설거지만 하십시오. 모든 게 다 그래요. 뭔가를 할 때 몰입해서 진득이 해야죠. 지금까지 살아보니까 가장 중요한 게 몰입인 것 같아요.

Q. 고향이 충남 서산이죠. 화백님 작품세계에 분명한 영향을 미쳤을, 그곳의 자연이 화백님께는 어떤 기억으로 남아 있나요?

등하굣길이 10리 가까이 되었는데 6년 동안 걸어 다녔어요. 고등학교 때는 일요일도 빠진 적이 없는 것 같아요. 매일 가서 그림을 그렸으니까. 우리 미술반 애들 5명이 모여서 그렇게 열심히 그렸어요. 아주 미친 듯이 그리는 친구들이 몇 있었죠. 그때는 뭣도 모르고 그린 거지. 학교에 소나무밭도 있었는데, 소나무밭에 누우면 햇빛이 막 쏟아지잖아요. 그 빛을 그린다고 여념이 없었죠. 무언가를 알지도 못하면서 시도하려고 하는, 진짜 그런 적이 있었어요.

작품 앞에서 포즈를 취하는 차정숙 화백

더 어릴 때로 가면 크레파스를 한 손에 꼭 쥐고 미루나무를 그리던 초등학생 차정숙의 기억이 있다. “언덕 위에서 저 멀리 보이는 미루나무가 마음에 쿵 하고 다가왔어요. 논둑, 밭둑에 우뚝 서 있는 한두 그루의 나무. 그 모습을 계속 그렸어요.”

서울에 살다가 초등학교 3학년 때 시골로 전학을 간 그의 적응을 도운 건 언덕, 나무, 자연의 이미지다. 그때의 고마움 때문일까, 여전히 그의 그림에는 종종 미루나무가 등장하곤 한다. 하지만 그 형태는 오히려 단순화됐다. “나이 들면서 우리 몸도 더 단순해지잖아요. 나를 아우르고, 정리하고, 그러다 보니 차츰 단순해지는 거예요. 그림도 단순화하고 싶어요.”

큰 화면이 하나 또는 몇 가지의 색으로 점점이 채워져 있을 뿐 차 화백의 그림에는 어떤 기교나 복잡함, 난해함이 없다. 그에게 색은 감정을 대변하는 언어이자 자연을 노래하는 마음이다. 봄 되면 봄을 노래하고 싶고, 여름 되면 여름을 노래하고 싶다는 그의 등 너머로 강렬한 붉음을 내뿜는 100호짜리 그림이 보였다. 언젠가 기차 여행 중, 차창으로 갑자기 비친 햇살에 눈을 감자 눈두덩이 온통 빨강으로 가득 찼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는 빨간색을 참 좋아한다며, 누군가는 너무 격렬한 표현이라고 하지만 자신은 아름답게만 느껴진다고 말했다. “볼수록 아름다운 색인 것 같아요. 역동적이면서도 차분하죠.”

점을 찍는 반복적인 행위로 거대한 100호짜리 캔버스가 채워지고 있다.

Q. 김환기 화백의 점화도 생각납니다. 영향을 받은 국내외 작가가 있나요?

처음에는 구상 작가들을 좋아했어요. 비구상 쪽으로는 크게 없었던 것 같아요. 다 존경하고, 모두 훌륭하시지만요. 어떤 외국 작가를 참 좋아해서 책도 사고 그랬는데, 이름을 잊어버렸네요. 그 옛날에 100만 원씩 주고 책도 샀는데. 아주 단순한 추상을 그리던 작가예요. 그냥 네모, 세모 이렇게. 말레비치도 아니고, 몬드리안도 아니고…. 그런데 지금 보니까 유영국 선생님이 생각나네요.

Q. 그러고 보니 유영국 선생님 작품에서 받을 수 있는 느낌도 있네요. 단순하면서 색으로 표현하는, 산도 많이 그리셨고요. 또 큰 화면을 고집해 오시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요?

처음에는 나이 먹기 전에 큰 작업을 해둬야지, 라는 생각으로 시작했어요. 힘이 달리면 못 하잖아요. 해보니까 참 좋아요. 힘은 들지만 보는 이들이 좋아하더라고요. 어떤 분은 전시 때 와서 “도심 속 자연에 들어와 있는 것 같다”라고 하면서, 그림하고 가까워진 사람이 많아요. 전시장의 그림 앞에 의자를 뒀어요. 앉아서 감상하시라고.

Q. 면이 색으로 채워져 있을 때 전해지는 무언의 아우라가 있는 것 같아요.

전시장에 들어오면서 벌써 “와~” 하세요. 그런데 한 선으로 끝낼 수도 있고, 점으로 끝낼 수도 있는 것을, 제 작품은 수많은 점, 수십만의 점이잖아요. 그러니까 더 감동하는 것 같아요. 고생 많이 했다고. (웃음)

Q. 감상자들이 작가님 작품을 어떤 마음으로 대했으면 하나요?

산에 가면 새들이 막 재잘거리고 계곡물이 흐르잖아요. 그런 자연을 바라보듯이, 그림 앞에 서면 그림을 그저 볼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림이 에너지도 줄 것이고, 아니면 쿵 하는 울림도 줄 것이고 그럴 것 같아요. 한 번은 전시할 때 아무 캡션(그림에 대한 설명을 제공하는 글)도 안 붙였어요. 그랬더니 한 감상자분께서 너무 좋다고 하시는 거예요. 보통은 테두리를 만들어서, ‘이런 테두리 안에서 봐라’고 한다는 거지. 그런데 아무것도 없으니 마음대로 느낄 수 있어서 좋대요.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선반에 한 점씩 꼼꼼이 포장해 정리해둔 그림들

Q. 작업실에서 하루는 어떻게 흘러가는지요?

작업실에서 제일 좋아하는 시간은 저녁 6시에서 8시 사이예요. 그 시간은 음악도 좋고―전기현 씨가 하는 ‘세상의 모든 음악’이 나오거든요―밖에는 해가 질 무렵이라 참 좋습니다. 수업이 없는 날은 오전 10시나 11시쯤 출근해 저녁 7시에서 8시 사이에 퇴근합니다.

Q. 직장인처럼 작업하시는군요.

어떤 사람들은 ‘필(feel)’이 와야 그림을 그린다고 하는데, 저는 그런 건 없는 것 같아요. 천재는 오려나 모르겠어요. 노력하는 만큼 되지 않을까요? 노력해서도 얻기는 힘들 수도 있지만, 그래도 노력하는 사람은 얻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옛날에는 밤새워 작업하는 게 좋았는데, 이젠 밤에 하면 다음 날 무리가 와서 아주 정확하게 작업을 해야 하더라고요. 낮에 하고 밤에 쉬고.

Q. 수십 년간 대회의 심사나 교육도 해오셨는데요. 그런 활동을 통해 후학들을 만나는 일, 예술가 공동체 활동이 작가님께 준 자극이나 배움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제자들에게 제가 가르치는 건 그림 하나잖아요. 배우는 건 엄청 많아요.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 행동하는 것에서 좋은 걸 보면 좋은 걸 배우고, 나쁜 걸 보면 반면교사로 삼죠. 제가 살아가고 성숙하는 데 무척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불교에서는 선지식이 필요하다고 하는데, 그분들이 전부 다 저의 선생님이 되시는 거예요.

Q. 창작에 있어서, 앞으로 시도하고 싶은 새로운 소재나 표현이 있는지도 궁금합니다.

시도해 보고 싶은 것은 너무 많아요. 그런데 가요도 자기 노래가 있잖아요. 그림도 내 그림이 있거든요. 그림을 막 바꾸면서 할 수는 없어요. 지금은 그렇지만, 그림을 하다 보면 조금씩 진화한다고 할까요? 바뀌어 나가는 거예요. 똑같은 그림을 그렸지만 뭔가 달라지고, 달라지고… 처음에는 아주 미세한 차이지만 나중에 보면 큰 폭으로 그림이 변화되어 있어요.

서울 현대백화점 무역센터점 헤드비갤러리에서 열리는 차 화백의 개인전 포스터

그가 쌓아온 ‘시간의 밀도’를 헤아려볼 수 있는 개인전이 현재 두 곳에서 진행 중이다. 판교 운중동과 서울 현대백화점 무역센터점에 위치한 헤드비갤러리에서. 판교에서는 7월 26일까지 조금 더 구상적인 대작들을, 서울에선 7월 31일까지 비구상적이고 단순한 작품들을 선보인다.

전시 소개 책자에는 이번 전시가 작가의 작업 세계에서 중요한 전환점이라고 쓰여 있다. 한 작가의 작품세계에 ‘전환점’이라는 말을 쓸 수 있는 것도 오직 그가 성실할 때라야만 가능한 일일 테다. 천천히, 아주 조금씩, 변화하고 자라고 뒤돌아보고 다시 시도하며 그렇게 작가도 작품도 성숙한다. 그러고 난 뒤에야 작품‘세계’라든지 ‘흐름’이라든지 하는 것을 가늠할 수 있게 된다.

차정숙 화백은 오늘도 캔버스에 점 하나를 찍는다. 어제도 그랬고, 내일도 그럴 것이다. 무수한 점들이 모여 속삭인다. 그 속삭임은 점점 커져 노래가 된다. ‘내 마음의 노래’가 되어 울린다. 감상자들의 귓가에 닿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성실하게 부르는 노래다.

[독서신문 이자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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