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기사는 일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
[메디먼트뉴스 이혜원 인턴기자]
눈부신 햇살이 내려앉은 남프랑스의 길 위에서, 음식과 와인, 낯선 대화들이 잔잔히 삶을 흔든다. 영화 <파리로 가는 길> (2016)은 인생의 갈림길에 선 한 여인의 '느린 여정'을 통해, 현대인의 빠른 삶 속에서 잊기 쉬운 여유와 감각을 되살려준다.
엘레노어 코폴라 감독이 80세에 내놓은 첫 장편 연출작으로, 그녀가 직접 경험한 칸에서 파리까지의 여정을 바탕으로 했다. 그만큼 영화에는 삶의 농도와 세월의 질감이 깊이 배어 있다.
목적지보다 여정이 중요한 영화
주인공 앤(다이앤 레인)은 일에 빠져 늘 바쁜 영화 제작자 남편 마이클(알렉 볼드윈)과 함께 칸 영화제를 방문한다. 그러나 비행기 문제로 파리에 혼자 갈 수 없게 된 앤은, 남편의 프랑스인 사업 동료 자크(아르노 비야르)의 제안으로 자동차 여행을 떠난다.
단 7시간이면 도착할 거리. 그러나 자크는 앤을 도로 가장자리의 고성으로, 시골 와이너리로, 평온한 미술관으로 이끈다. 이 돌발적인 여정 속에서 앤은 오랜만에 ‘멈춰 서서’ 풍경을 감상하고, 음식을 음미하고, 자신의 감정을 들여다본다.
음식과 와인, 삶의 감각을 깨우다
<파리로 가는 길> 의 핵심 정서는 '미각의 영화'다. 와인과 음식이 단순한 배경이 아닌 서사의 동력으로 등장한다.
자크는 여행 중 끊임없이 ‘음식과 와인의 궁합(마리아주)’을 강조한다. 샤토뇌프 뒤 파프, 꽁드리유, 꼬뜨 로띠 등 프랑스 각 지역의 와인이 메뉴에 따라 바뀌고, 앤은 그 페어링을 통해 점차 자신의 감각을 회복해간다.
이 마리아주는 단순히 입속의 조화를 넘어, 앤과 자크 사이의 은유적 관계로 확장된다. 서로 다른 세계에서 온 두 사람이 풍경과 맛, 대화를 공유하며 미묘한 온기를 나누는 순간들. 이것이 영화가 말하는 ‘인생의 진짜 마리아주’다.
회화처럼 흐르는 프랑스 풍경
영화의 시각적 구성 또한 인상적이다. 남프랑스의 엑상프로방스, 리옹, 부르고뉴, 베즐레, 파리를 지나며 펼쳐지는 풍광은 마치 르누아르의 회화처럼 고요하고 따뜻하다.
카메라는 도시의 모습보다 들판, 강가, 오래된 레스토랑의 창가 풍경에 오래 머문다. 이 정적인 카메라 워크는 관객에게도 ‘함께 여행하는 듯한 감각’을 제공한다.
삶에 대해 묻는 영화
영화의 제목은 Paris Can Wait, 직역하면 “파리는 기다릴 수 있어.” 빠르게 도착하는 것보다, 지금 눈앞의 순간을 충분히 누리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선언이다.
앤은 처음엔 이 느긋한 여정이 불편하지만, 점차 “내가 진짜 원하는 건 무엇인가?”, “나는 행복한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관객 또한 그녀와 함께 그 질문을 품는다.
당신의 ‘느린 길’은 어디에 있나요?
<파리로 가는 길> 은 드라마틱한 사건 없이도 마음을 두드리는 영화다. 인생이란 꼭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아도 괜찮다고, 가끔은 엉뚱한 길로 돌아가도 된다고 말한다.
음식, 와인, 풍경, 대화, 그리고 침묵까지. 이 모든 것들이 한 편의 느긋한 시(詩)처럼 녹아들어 있는 이 영화는, 바쁘게 살아가는 우리에게 따뜻한 쉼표를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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