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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디먼트뉴스 이혜원 인턴기자] 프랑스 미식 영화의 진수라 불리는 트란 안 훙 감독의 신작 〈프렌치 수프〉는 단순한 요리 영화가 아니다. 이 작품은 식탁 위에서 조용히 피어나는 감정, 주방의 정적 속에서 오가는 시선, 그리고 오래된 관계에 스며 있는 고요한 긴장을 마치 한 접시의 완성된 요리처럼 조형적으로 빚어낸다.
‘요리’로 말하는 사랑, ‘식사’로 이어지는 관계
19세기 프랑스 전원 저택. 미식가 도댕(브누아 마지멜)은 자신의 저택에서 천재 요리사 외제니(쥘리에트 비노쉬)와 20년째 함께 살고 있다. 둘은 부부가 아니지만 매일같이 함께 식사를 하고, 외제니는 도댕을 위해 정성을 다해 식탁을 차린다. 침실보다 주방에서 더 많은 사랑이 오고 가는 이들은 요리를 통해 감정을 표현하고, 식사를 통해 서로를 이해한다.
외제니는 요리사로서의 자존감을 지닌 인물이다. 도댕이 반복해서 청혼을 하지만, 그녀는 결혼이 자신의 정체성을 지워버릴까 두려워 이를 거절한다. 사랑은 분명 존재하지만, 그 사랑을 형성하는 방식은 독립성과 자율성을 기반으로 한다. 영화는 이런 외제니의 주체적인 선택을 존중하면서도, 두 사람 사이의 감정적 밀도는 결코 낮추지 않는다.
‘시선이 닿는 순간’… 감정의 결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건, ‘침묵’과 ‘시선’이다. 대사를 줄이고 대신 손의 움직임과 눈빛의 교차를 강조하는 연출은 인물 간의 관계를 말보다 깊게 전달한다. 외제니가 요리를 할 때, 도댕이 그 과정을 지켜보는 시선 속에는 미묘한 존경, 연민, 애정이 동시에 깃든다. 음식이 익어가는 시간처럼, 이들의 사랑도 천천히 농익는다.
이들의 관계는 ‘전통적 로맨스’와는 다르다. 육체적 관계가 아닌, 요리의 과정과 결과, 주방이라는 공간의 공유를 통해 내밀한 사랑을 형성한다. 그래서 영화는 다정하면서도 쓸쓸하고, 따뜻하면서도 서늘하다.
관능적이되 노출 없는 요리
〈프렌치 수프〉는 관능적인 감정을 노출 없이 표현하는 데 성공한 보기 드문 영화다. 흔히 에로틱한 연출로 소비되는 요리 장면을 감독은 오히려 섬세한 감정의 레이어로 재구성한다. 주방 안에서의 협업, 칼질과 불 조절, 향기와 기름의 소리. 이 모든 것이 감각의 언어가 되어 두 인물 사이에 흐르는 기류를 만들어낸다.
놀랍게도 침실 장면은 등장하지 않는다. 감독은 의도적으로 시각적 소비를 배제하고, 대신 관객의 상상력에 사랑의 완성을 맡긴다. 요리의 ‘여운’처럼 사랑의 ‘잔향’을 남기는 방식이다.
오래된 감정, 천천히 끓는 시간
감독 트란 안 훙은 이 영화를 통해 사랑의 한결같음과 덧없음을 동시에 그려낸다. 식탁 위에 오른 정찬처럼, 모든 것이 완벽하게 준비된 순간에도 사랑은 영원할 수 없고, 사람은 결국 떠난다. 영화 말미, 다시 돌아온 주방에서 들려오는 외제니의 말 한마디가 지난 모든 시간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이 영화는 요리를 예술로, 식사를 관계로, 주방을 사랑의 무대로 치환시킨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이 긴 여운을 남기며 관객의 마음을 건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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