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스경제=전시현 기자] 스테이블코인을 둘러싼 글로벌 통화 주권 경쟁이 본격화되고 있다. 미국은 디지털 달러를 표방한 스테이블코인을 제도권에 편입하며 달러 패권을 강화하고 있고, 한국은 K콘텐츠 기반의 원화 스테이블코인으로 새로운 금융 질서를 모색하고 있다.
하지만 외환 규제의 사각지대, 제도 미비, 디지털 공매도 공격 우려 등 해결해야 할 과제가 만만치 않다.
◆ 美, 스테이블코인으로 국채 팔고 달러 패권 강화…韓, '한류' 통해 원화 국제화 시도
대표적인 스테이블코인인 테더(USDT)와 USDC은 올해 1분기 기준 발행 시 확보한 담보 자산으로 약 1283억달러에 달하는 미국 국채를 보유하고 있다. 테더는 1034억달러, USDC를 발행하는 서클은 249억달러 규모의 미 국채를 보유해 한국의 국채 보유량(1246억달러)을 처음으로 넘어섰다. 스테이블코인이 성장할수록 자연스럽게 미국 국채 수요가 늘어나고, 이는 미국 정부의 재정 조달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지난 17일 미 상원을 찬성 68표, 반대 30표로 통과한 지니어스법(GENESIS Act) 역시 스테이블코인을 제도화해 이를 디지털 달러처럼 운영하려는 미국의 전략을 뒷받침하고 있다. 스테이블코인을 통해 전 세계 결제 시장에서 디지털 형태의 달러 사용을 늘리고 기존 달러 패권을 유지·확장하겠다는 복안이다. 미국 금융당국은 이러한 정책 방향에 따라 발행 조건, 준비 자산, 감독 기준 등을 세분화하고 있으며 주요 발행사는 국채 외에도 머니마켓펀드 등 안전 자산 중심으로 자금을 운용하고 있다.
한국도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준비 중이다. 더불어민주당 민병덕 의원이 10일 대표발의한 디지털자산기본법은 K팝, 웹툰, 게임 등 한류 콘텐츠를 중심으로 결제 수단을 원화 기반 스테이블코인으로 전환하자는 구상을 담고 있다. 국내외 팬들이 K플랫폼에서 디지털 콘텐츠를 즐기며 자연스럽게 원화 코인을 사용하는 구조다. 이를 통해 한국 원화가 글로벌 시장에서 디지털 통화로 기능할 수 있는 길이 열릴 것이라는 기대가 높아지고 있다.
정치권과 산업계는 한류 콘텐츠를 활용해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글로벌 결제 수단으로 키우자는 전략에 주목하고 있다. 예컨대 전 세계 팬들이 BTS 굿즈나 한국 드라마 관련 상품을 구매하는 과정에서 원화 코인을 자연스럽게 접하게 되는 구조다. 더불어민주당 디지털자산위원회 관계자는 "K콘텐츠가 강력한 해외 팬덤을 확보하고 있는 만큼,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이를 기반으로 한 결제 수단으로 정착시키면 디지털 원화의 위상을 높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한 디지털금융 전문가는 "미국의 스테이블코인이 국채 수요를 이끄는 '숨은 채권시장' 역할을 하는 것처럼, 한국도 콘텐츠 결제를 통한 원화 수요 기반을 확보할 수 있다"며 "특히 동남아나 중동, 남미 시장에서 K컬처와 연결된 디지털 화폐 수요는 점차 증가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 "실수 땐 외환위기 재현 우려…제도화 안되면 '디지털 IMF' 될 수도"
하지만 이에 대한 경고도 나오고 있다. 안유화 중국증권행정연구원 원장은 "원화 스테이블코인은 지금으로선 할 수밖에 없는 흐름이지만, 외환 통제를 벗어난 채 국경을 넘나들면 외국 세력이 공매도로 원화를 공격할 가능성도 크다"고 밝혔다. 이어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통화 주권의 설계 문제"라며 "외환시장과 자본시장이 맞물리는 구조에서 위험 관리 없이 디지털 통화를 발행하면 금융 불안정성이 커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본격적으로 도입하기에 앞서 제도적 기반과 감독 체계가 미비하다는 점은 여전히 가장 큰 걸림돌로 지적된다. 전문가들은 스테이블코인의 속성상 국경을 초월한 실시간 거래가 가능해지기 때문에, 현재 한국이 유지하고 있는 외환 통제 장치가 무력화될 수 있다고 우려한다. 실제로 현행 외환거래법은 원화의 해외 유출을 엄격히 제한하고 있으나 디지털 자산의 형태로 변환된 원화가 블록체인망을 통해 유통되면 사실상 정부의 통제 밖에서 거래가 이뤄질 수 있다.
또한 코인을 발행하는 주체가 누구인지, 담보 자산을 어떻게 보관하고 운용할 것인지, 발행량은 어떤 기준으로 관리할 것인지 등 기본적인 관리·감독 체계도 확립되지 않은 상황이다. 현재 발의된 법안에서는 자기자본 10억원 이상을 발행 요건으로 제시하고 있으나, 지금과 같이 명확한 법적 근거 없이 스테이블코인이 민간 또는 일부 금융기관 주도로 유통될 경우 준비금의 건전성과 운영 투명성에 대한 신뢰를 확보하기 어려워질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 역시 물가안정상황 점검 기자간담회에서 "원화 스테이블코인 발행 시 달러 스테이블코인 수요가 확대돼서 외환 관리가 어려워질 수 있다"며 "제도 없이 발행될 경우 외환시장 교란 등 작용이 생길 수 있다"고 경고한 바 있다.
일각에서는 디지털 공매도와 같은 투기적 공격을 방어하기 위한 비상 대응 프로토콜 마련도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원화가 글로벌 시장에서 실시간으로 거래될 수 있다면 원화 가치를 겨냥한 대규모 매도 세력이 언제든지 등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스테이블코인의 기술적 가능성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법률 정비와 감독 인프라 구축, 그리고 위기 대응 시나리오 마련이 병행돼야 한다는 데 금융권과 전문가들의 의견이 모이고 있다.
스테이블코인을 둘러싼 핵심 쟁점은 결국 “누가 이 돈을 찍어내느냐”에 달려 있다. 현재 글로벌 시장에서 유통되는 대부분의 스테이블코인은 민간 기업이 발행하고 있으며, 이들은 확보한 달러 준비금을 미국 국채나 단기금융상품에 투자해 막대한 수익을 올리고 있다. 일종의 ‘디지털 조폐권’을 쥐고 있다는 평가다.
코인마켓 A 거래소 관계자는 “은행이 발행을 독점하면 결국 테더를 원화로 바꾸는 환전 창구에 불과해질 것”이라며 “민간이 생태계를 주도해야 원화 기반 디지털 통화가 글로벌 결제 시장으로 뻗어나갈 수 있다”고 말했다.
가능성만큼이나 리스크도 크다. 외환시장 충격, 제도 미비, 통화 신뢰 붕괴는 언제든지 현실화될 수 있는 위험 요소다. 이 관계자는 “이제 중요한 건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라며 “디지털 시대에는 누가 먼저 발행하느냐보다, 누가 금융 질서를 설계하느냐가 진짜 권력이 된다”고 귀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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