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스경제=전시현 기자] 내년 ESG 공시 의무화 시행을 앞두고 국내 기업들이 ‘데이터 신뢰성’이라는 새 시험대에 오르게 됐다.
시장에서는 그린워싱(위장 환경주의) 논란과 함께 데이터 수집 구조의 근본적 한계가 드러나며 ESG 정보 전반에 대한 불신이 퍼지고 있는 상황이다. 이에 따라 한 번 기록되면 위·변조가 불가능한 블록체인 기술이 새로운 해결책이자 '구원투수'로 주목받고 있다.
◆ 그린워싱 급증···기업 신뢰도 바닥
올해부터 유럽연합(EU)의 기업 지속가능성 보고 지침(CSRD)이 본격 시행되고 내년 자산총액 2조원 이상 상장사의 ESG 공시 의무화가 추진되면서 국내 기업들의 '그린워싱' 사례는 급증해 우려를 자아내고 있다. 그린워싱은 실제와 다른 ‘친환경’ 이미지를 내세우는 부당한 환경성 표시·광고 행위를 말한다.
최근 몇 년 사이 실제 환경성과 무관한 ‘친환경 마케팅’이 쏟아지면서, 소비자가 현혹될 수 있다는 우려 역시 커져가고 있다. 환경부에 따르면 부당한 환경성 표시·광고 적발 건수는 2020년 110건에서 2023년에는 4940건까지 늘었다. 뿐만 아니라, 2024년 들어서도 2528건이 적발돼 4년 만에 23배 증가라는 기록적 수치를 보였다.
이처럼 가파른 상승세 이면에는 기업들이 ESG 평가를 명분으로 앞다퉈 '친환경'을 내세우면서도 정작 실질적 성과보다는 이미지 포장에 치중해온 구조적인 문제가 있다. 업계에서는 "그린워싱이 ESG의 본래 취지를 크게 훼손하고 있다"는 비판이 거세게 나오고 있다.
실제 사례를 보면, 포스코는 올해 4월 ‘그리닛(Greenate)’ 브랜드의 일부 제품이 공정거래위원회에 의해 그린워싱 혐의로 정식 안건에 올랐고, 삼성전자는 온실가스 배출이 늘었음에도 '녹색상품' 홍보를 지속했다.
단순히 사례만이 아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공식 보고서에 허위 사실이 기재되는 경우다. 현대건설은 2020년부터 최근까지 환경법 위반과 과태료 처분을 여러 차례 받았지만, 2024년 발간한 지속가능경영보고서에는 해당 위반 사실을 '0건'으로 기록했다. 삼성물산과 포스코이앤씨 역시 법규 위반 이력이 있음에도 관련 자료를 공시에서 누락했다. 이 같은 사례는 외형적으로는 ESG 경영을 내세우면서도 정작 투명성과 책임은 등한시하고 ‘보고서용 경영’에 머물러 있다는 비판으로 이어지고 있다.
문제의 본질은 결국 보고서 작성 그 자체가 아니라, 그 내부에 입력되는 데이터 관리 시스템의 구조적 취약성에 있다는 지적이 크다. ESG 공시는 수많은 내부 데이터를 수집·분석해 밖으로 투명하게 공표하는 과정이지만 국내 상당수 기업은 이를 뒷받침해줄 체계적 시스템 자체가 부족하다.
실제 기업 현장을 들여다보면, ESG 항목별 데이터를 누가 책임지고 관리하는지 명확하지 않거나, 사업부별로 정보가 흩어진 사례가 대다수다. 환경 관련 일부 수치는 수기로 취합되거나 외부 위탁업체의 보고서를 검증 없이 활용하는 등, 데이터 관리가 체계화되어 있지 않은 곳이 적지 않다. 이런 과정에서 오류·누락·과장이 발생해도 이를 걸러줄 전사적 통제 시스템이 없다 보니, 왜곡된 내용이 그대로 최종 보고서에 담긴다.
여기에다 ESG 담당 부서를 경영기획이나 홍보부서 내에 두면서 데이터 관리는 뒷전, 이미지 포장에 치중한다는 점도 문제로 지적된다. 실제로 ESG가 데이터 기반 경영이 아닌, 이미지 중심의 마케팅 도구로 전락했다는 비판적 시각이 여기서 비롯된다.
◆ 블록체인, 위변조 불가 투명성 무기
이렇듯 구멍 난 ESG 공시의 신뢰도를 복원하려면, 데이터의 ‘입력부터 검증까지’ 전 과정을 투명하게 추적할 수 있는 기술적 혁신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강해지고 있다. 특히 위·변조가 불가능한 블록체인 기술이 ESG 데이터 신뢰성의 핵심 해법으로 부각되고 있다.
블록체인은 기록 생성 시점부터 변경 이력까지 모두 저장되고, 외부에서도 실시간 추적이 가능한 점에서 ESG 데이터의 진위를 보장하는 핵심 기술로 주목받는다. 온실가스 배출량, 에너지 사용량, 폐기물 처리 이력 등 정보를 수작업 입력이나 엑셀 기반 관리에서 벗어나 센서를 통한 실시간 데이터 수집과 블록체인 등에 기록하는 방식으로 전환하면, 기업은 물론 투자자와 규제기관 모두 같은 데이터를 공유할 수 있게 된다.
고진석 블록ESG 공동창업자는 "ESG 공시에 블록체인 기술을 접목하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복잡한 과제"라고 진단한다. "무엇보다 신뢰할 만한 고품질 데이터를 확보하는 일이 가장 중요한데, 높은 초기 비용과 기업 내부의 기술 전문성 부족이 분명한 한계"라며 "기준이 제각각인 ESG 데이터, 기존 IT 인프라와의 낮은 호환성, 데이터 주권과 보안 문제까지 복합적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밝혔다.
그는 해법에 대해 "정부의 역할이 결정적"이라며, "블록체인 기술 도입 지원과 세제 혜택 등 다양한 인센티브 제공이 병행돼야 기업이 실질적 전환을 시도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이와 함께 "업계 전반에 통일된 ESG 데이터 표준 설정, 오픈소스 플랫폼 활성화, 그리고 전문 인력 양성 등, 지속 가능한 생태계 구축이 더욱 시급하다"고 덧붙였다.
이미 선진국 일부에서는 ESG 데이터 기록에 블록체인을 접목한 파일럿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다. EU는 탄소배출 추적에 블록체인 도입을 추진하고 있으며, 글로벌 컨설팅사 EY는 ESG 리포팅에 특화된 블록체인 플랫폼을 개발하고 있다.
국내에서도 대형 통신사와 정유업체들이 탄소배출 데이터 투명성 확보를 위해 블록체인 시범 도입에 나섰다. 여기에 더해, 블록체인 기반 ESG 데이터 플랫폼을 구축, 투명하고 검증 가능한 공시 체계 마련에 나서는 기업들도 늘고 있다.
먼저 SK AX(옛 SK C&C)는 블록체인 메인넷 '체인제트(ChainZ)'를 활용해 폐기물·재활용 자원 추적 시스템을 구축했으며, 쿤텍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한국인터넷진흥원과 함께 ‘2023년 블록체인 민간 분야 집중·확산 사업’의 일환으로 중소기업용 ESG 데이터 플랫폼 'PlanESG'를 개발·지원하고 있다. 부산의 블록체인 혁신기업 딥브레인 역시, 한전과 부산항만공사와 함께 실시간 전력·탄소 배출 절감 데이터를 IoT로 수집해 블록체인에 기록, 신뢰성 있는 증빙 체계를 마련했다.
◆ 글로벌 규제 압력···선택 아닌 필수
ESG 데이터 신뢰성 확보가 더 시급해진 이유는 글로벌 규제의 압박 때문이다. EU의 CBAM(탄소국경조정제도)이 2026년 본격 시행되면 국내 철강업계만 10년간 3조원의 추가 비용을 부담해야 할 것으로 전망된다. CBAM은 데이터의 ‘검증 가능성’을 요구하는데, 이처럼 신뢰할 수 있는 기술이 필수로 떠오른다.
2027년부터 시행되는 EU의 CSDDD(기업 지속가능성 공급망 실사지침)는 한층 더 강력하다. 공급망 전체에 대한 인권·환경 리스크 실사를 요구하며 적발 시 전 세계 매출의 5%에 달하는 과징금 또는 직접 소송까지 불사한다.
단, 블록체인이 모든 문제를 단번에 해결해줄 ‘만능키’는 아니라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IoT 기반 자동 데이터 수집, 인공지능(AI) 분석·검증 등 타 기술과의 융합 없이는 한계가 뚜렷하다.
업계 전문가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검증 가능한 데이터의 시대에 블록체인은 가장 강력한 도구임은 분명하다"며 "이제 기업의 화두는 단순한 도입 여부가 아니라 현실적인 통합과 경쟁력 확보 방안 마련에 집중돼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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