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신문 양우혁 기자】한국형 차기 구축함(KDDX) 사업이 1년 반 넘게 표류 중이다. HD현대중공업과 한화오션 간의 수의계약·경쟁입찰 갈등 속에 방위사업청은 명확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논의만 되풀이하고 있다. 8조 원 규모의 국책사업이 장기간 공전하면서, 방산업계 안팎에서는 정부 조정력 상실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15일 업계에 따르면, 방사청은 지난 3월과 4월 두 차례 ‘방위사업기획관리 분과위원회’를 열고 KDDX 사업자 선정 방식을 논의했지만 결론을 내지 못했다. 수의계약·경쟁입찰·공동설계 등 세 가지 안건을 검토했으나, 이후 방위사업추진위원회(방추위)에서도 안건이 상정되지 못하며 추진이 무기한 연기된 상태다.
KDDX는 해군이 추진 중인 7,100t급 차세대 구축함 개발 사업으로, 2030년까지 6척을 국내 기술로 설계·건조할 방산 전략 프로젝트다. 개념설계는 대우조선해양(현 한화오션), 기본설계는 HD현대중공업이 맡았으며, 통상 기본설계를 수행한 업체가 상세설계·선도함 건조까지 수의계약으로 이어받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HD현대중공업 일부 직원의 군사기밀 유출 사건으로 상황은 달라졌다. 해당 사건은 형사 재판에서 유죄 판결이 내려졌고, 한화오션은 이를 근거로 수의계약의 공정성과 신뢰성이 훼손됐다고 보고 경쟁입찰 방식을 주장하고 있다. 반면 HD현대중공업은 기본설계를 수행한 업체가 상세설계를 이어가는 것이 설계 연속성과 사업 효율성 측면에서 합리적이라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방사청은 양사의 입장 차이를 좁히지 못한 채 수의계약, 경쟁입찰, 공동수행 등 세 가지 방안을 검토해왔다. 다만 공동설계는 기술적 연계성과 책임소재가 모호하다는 점에서 실현 가능성이 낮다는 판단이 우세하다. 신현승 방사청 함정사업부장도 지난 3월 “상세설계와 선도함 건조는 기술적으로 분리하기 어렵다”며 사실상 공동수행 방안에 선을 그은 바 있다.
결과적으로 방추위 안건 상정은 무산됐고, 구체적인 사업 추진 일정은 기약 없이 멈춰 섰다. 방사청은 쟁점이 많아 추가 논의가 필요하다는 입장이지만, 해군 전력화 일정을 고려할 때 정책 결단이 늦어지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한 업계 관계자는 “사업이 장기화될수록 해군의 운용계획과 선박 설계 주기를 다시 조율해야 하고, 이로 인한 비용과 일정 재조정도 불가피해진다”며 “조속한 방향 설정이 이뤄지지 않으면 전력화 일정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우려했다.
현재 HD현대중공업은 입장 표명을 자제하고 있으나, 내부적으로는 기본설계의 연속성과 사업 효율성을 강조하며 정부 측에 설득 논리를 강화하고 있다. 반면 한화오션은 ‘윤리성과 신뢰의 문제’로 규정하며 경쟁입찰 원칙을 고수하는 한편, 공동수행 방식도 차선책으로 검토하고 있다.
조선업계도 사업 향방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KDDX는 단순한 조달사업을 넘어 수출 가능성이 높은 전략사업으로 평가된다. 방산 수출시장에서 ‘자국군 운용 실적’은 무기체계 신뢰성의 핵심 기준이기 때문이다. 업계 일각에서는 KDDX 선도함을 통해 해외 수출 실적 확보의 교두보를 마련해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실제로 HD현대중공업과 한화오션은 지난해 호주 해군의 10조 원 규모 차기 호위함 사업에서 모두 고배를 마셨다. 업계에서는 당시 국내 조선업체 간 갈등이 봉합되지 않은 채 각각 개별 입찰에 나서면서 오히려 경쟁력이 분산됐다는 지적도 나온다.
지연된 전력화 일정은 해군에도 부담이다. 양용모 해군참모총장은 지난달 말 양측 조선소에 공식 서한을 보내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 고도화와 주변국 해군력 증강 속에 전력화 지연 우려가 크다”며 조속한 사업 정상화를 요청했다.
이런 가운데 새 정부가 방산 산업을 ‘국가대표 전략 산업’으로 명확히 규정하고, 지원체계 개편에 나서면서 KDDX 사업의 정상화 기대도 높아지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은 방산 수출 확대를 위한 대통령 주재 전략회의를 정례화하고, 방위산업담당관 기능을 경제수석실로 이관해 금융·세제·수출 지원을 통합 추진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특히 방위사업청에는 중소벤처기업부의 ‘사업조정제도’를 참고한 내부 조정기능 도입을 추진 중이다. 과도한 국내 경쟁을 조율하고, 해외 수주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로, 실제 제도화가 이뤄질 경우 KDDX와 같은 갈등형 사업에 대한 정책 개입도 가능해질 것으로 기대된다.
전문가들은 이번 사안이 단순한 업체 간 갈등을 넘어, 정부 조정 실패에서 비롯된 구조적 문제라고 지적한다. 특히 조속한 원칙 정립과 사업 추진 기준 마련 없이는 방산 산업 전반의 신뢰성과 지속 가능성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는 분석이다.
최기일 상지대학교 군사학과 교수는 “이번 사안은 단순한 입장차가 아니라 정부가 사업자 선정 기준과 방산정책의 일관성을 확립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 구조적 실패”라며 “시장에 맡겨야 할 영역과 정부가 개입해야 할 영역을 혼동한 채 결정을 미루는 방식은 방산 생태계에 불확실성만 키운다”고 진단했다.
이어 그는 “지금이라도 명확한 기준과 절차를 세워 사업자 선정 방식부터 체계적으로 정립해야 한다”며 “지속가능한 방산 생태계와 국제 경쟁력을 위해 정부가 책임 있는 결정을 내려야 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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