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리뉴스 박수남 기자]한때 '투기 자산'이라는 오명을 벗지 못했던 가상자산이 이제 제도권 금융의 새로운 블루오션으로 떠오르고 있다. 2024년 7월 가상자산이용자보호법 시행을 계기로 디지털자산 시장 제도화가 본격화된 가운데, 올해 들어 시중은행들까지 가상자산 사업 진출에 적극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다.
은행권은 "공신력과 소비자 보호 역량을 갖춘 은행이 가상자산 관련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도록 규제 완화가 필요하다"며 새 정부를 향해 제도 개선을 강력히 요구하고 나섰다. 그동안 거래소 중심으로 운영되던 가상자산 시장에 은행이라는 새로운 플레이어가 등장할 경우, 시장 생태계에 어떤 변화가 일어날까.
신뢰와 투명성, 은행 진출의 기대효과
은행의 가상자산 시장 참여는 무엇보다 시장 신뢰도 제고에 큰 역할을 할 것으로 전망된다. 수십 년간 축적된 은행의 자금세탁방지(AML) 시스템과 내부통제 노하우는 그동안 투자자 보호에 한계를 드러냈던 가상자산 시장에 새로운 안전망을 제공할 수 있다.
특히 현재 거래소 위주로 형성된 시장 구조에 경쟁 체제가 도입되면서 서비스 품질 향상과 수수료 인하 등 소비자 편익도 늘어날 것으로 기대된다. 한 금융업계 관계자는 "은행이 직접 가상자산 서비스를 제공하게 되면 기존 거래소들도 더 나은 서비스를 위해 경쟁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제도권 편입은 혁신적인 금융상품 출시도 앞당길 전망이다. 이미 미국과 홍콩에서는 가상자산 현물 ETF가 승인돼 활발히 거래되고 있으며, 일본 역시 관련 법제 정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국내에서도 필요한 법적 토대만 마련되면 투자자들이 보다 안전한 환경에서 이런 상품들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주목할 점은 국내 가상자산 거래소에서 달러 연동 스테이블코인 거래량이 분기당 57조원에 달할 정도로 시장이 급성장했다는 사실이다. 이 거대한 유동성이 제도권 금융과 연결된다면 금융업계의 새로운 성장 엔진 역할을 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변동성과 보안, 넘어야 할 산
하지만 은행권의 가상자산 진출 길목에는 만만치 않은 장애물들이 도사리고 있다. 가장 큰 우려는 가상자산 특유의 극심한 가격 변동성이다. 하루에도 수십 퍼센트씩 등락을 거듭하는 가상자산의 특성상 은행들은 기존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리스크 관리 과제에 직면하게 된다.
사이버 보안 위협도 무시할 수 없는 요소다. 만약 은행이 운영하는 가상자산 서비스에서 대규모 해킹이나 자산 손실 사고가 발생한다면 해당 은행은 물론 금융시스템 전반의 신뢰에도 치명적인 타격을 줄 수 있다.
더 큰 문제는 제도적 기반의 부재다. 현재 국내 법체계에서 암호화폐는 자본시장법상 금융투자상품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어 암호화폐 연계 ETF 출시조차 막혀 있는 상황이다. 과세 체계 등 제반 인프라도 미비한 상태다.
한 디지털자산 업계 전문가는 "암호화폐 ETF는 변동성 리스크와 제도 미비가 핵심 과제이고, 스테이블코인의 경우 금융당국과 한국은행 간 규제 주도권 갈등이 걸림돌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기본법 제정, 시급한 현안
국내 디지털자산 시장이 본격적인 성장 궤도에 오르려면 무엇보다 포괄적인 법제 정비가 선행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현행 개별 법률들이 이용자 보호 등 부분적 대책에만 치중하고 있어, 가상자산 발행부터 공시까지 전 과정을 아우르는 완결성 있는 기본법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이 기본법은 가상자산 이용자 보호와 산업 육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있는 균형잡힌 틀을 제시해야 한다. 가상자산의 법적 정의를 명확히 하고, 증권형 토큰(ST) 등 기존 자본시장과 겹치는 영역에서의 규율 범위도 정립해야 한다.
특히 스테이블코인은 화폐 대체재로서의 특성상 규제 공백이 발생할 경우 자본 유출 통로로 악용될 위험이 크다. 따라서 중앙은행과 금융당국 간 역할 분담을 법률로 명확히 규정하는 것이 시급하다.
미국을 비롯한 주요국들이 달러 기반 스테이블코인 육성에 적극 나서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나라만 이 분야를 제도권 밖에 방치할 수는 없다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아울러 투자자 보호 차원에서 적합성 원칙, 설명의무, 이해상충 방지 등 금융소비자보호법상 보호장치를 가상자산 거래에도 적용하는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는 의견도 제기된다.
혁신과 안정성의 조화
은행권의 가상자산 시장 진출은 이제 피할 수 없는 시대적 흐름이 됐다. 문제는 이런 변화의 물결을 어떻게 안전하고 투명한 제도적 틀 안에서 수용하느냐에 달려 있다.
디지털자산이라는 새로운 금융 패러다임에서 우리 금융권이 신뢰받는 혁신 주체로 자리매김하려면 정부와 국회의 선제적 대응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규제와 육성, 혁신과 안정성 사이의 절묘한 균형점을 찾아내는 것이 향후 국내 디지털자산 시장의 성패를 좌우할 핵심 변수가 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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