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는 오래전부터 인권을 바탕으로 사회를 발전시켜 왔다. 모든 인간이 천부적인 존엄과 권리를 가지며 이를 보호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인식은 보편적인 가치로 여겨졌다. 이후 동물권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되면서 인간 중심적인 사고를 넘어 동물 또한 불필요한 고통에서 보호받아야 한다는 윤리적 인식이 자리 잡아가고 있다.
그렇다면 식물은 어떨까. 인류는 아직까지 식물이 단순한 자원 이상이며 고유한 존엄을 지니고 살아간다는 생명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워 보인다. 하지만 식물의 생명을 경시하고 도구적 관점에서 이들을 착취한 결과 인간은 기후위기와 생태계 훼손이라는 결과와 직면하게 됐다. 식물이 소비의 대상을 넘어 존중의 대상이라는 관점이 이제는 필요한 때다.
본보는 ‘식물해방일지’ 시리즈를 통해 국내에서 아직 생소한 개념인 식물 존엄성을 조명하고 식물을 도구로 취급하는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인간과 식물의 공존을 모색하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고자 한다. 특히 2023년 국내 최초로 발표된 식물 존엄성 선언을 바탕으로 식물에 대한 새로운 윤리적 접근과 그 실천적 의미를 살펴본다.
이를 통해 기후위기 시대에 지속 가능한 생태적 삶의 방향을 함께 고민하는 장을 만들고 정책적 전환의 필요성을 논의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투데이신문 권신영 기자】“There is no Plan B, because we do not have a Planet B (두 번째 행성은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차선책은 없다)_반기문 전 UN총장
한때 식물을 섬기고 숲과 공존하던 인류는 현대 사회에 접어들며 태도를 바꿨다. 고도로 복잡해진 공정 과정과 편리화된 생활 양식을 얻게 되면서 우리는 식물에 많은 빚을 져 왔다. 우리는 식물의 터전을 훼손하고 식물과 나누던 땅과 물을 독점했으며 식물 그 자체를 착취했다. 환경오염으로 인한 기후위기가 닥쳐왔음에도 이 같은 착취 양상은 경제성이라는 미명 하에 끝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현실에서는 여전히 전국 곳곳에서 수십, 수백 년을 살아온 보호수가 관리 부실과 개발 논리에 밀려 훼손당하고 개발 과정에서 야생 식물 군락지가 통째로 사라지는 일이 적지 않다. 당장 2022년에는 드라이브 명소인 제주도 비자림로를 확대하겠다는 계획에 따라 삼나무 약 3400그루가 잘려 나갔으며, 2023년에는 100년 된 가덕도의 산서어나무 군락이 ‘가덕도 신공항’을 위한 개발로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식물은 대기 중 탄소를 흡수하고 산소를 배출하며, 토양을 정화하고 생물 다양성을 유지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맡는 생명 공동체의 구성원이다. 특히 기후위기 시대에 식물은 자연의 자정 능력을 유지하는 최후의 방파제라고도 평가된다. 이렇듯 식물은 기후위기 대응에 있어서 큰 역할을 한다는 점 외에도 살아 있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존중받을 가치가 있는 존재다. 인간의 생명에 가치가 있듯, 식물 또한 생태적 관점에서 지구 환경에 적응하고 살아가는 유기체로서 같은 가치를 지닌다.
하지만 식물 대부분이 소리를 내지 않고 움직임이 더디다는 이유로 그들의 생명에 대한 논의가 이뤄지지 않았다. 이 같은 식물의 특성을 열등하게 여기고, 인간 중심의 사고관이 초래한 결과가 바로 오늘날의 기후위기라는 점에서 식물 생명에 대한 존엄 개념은 생태계 전체의 지속가능성을 위한 최소한의 윤리적 조건이라 할 수 있다.
식물 보호 인식을 확산하고 식물 생태계의 지속가능성과 생물 다양성을 유지하기 위해 제정된 ‘식물 존엄성 선언문’ 제1장에서는 “인간의 행위가 식물의 생존·성장·번식을 불가능하게 만들거나 심각하게 방해하는 행위는 행해서는 안 된다”고 명시하고 있다.
식물은 그 자체의 좋음을 지향하는 진화적 유기체로서 그 과정에서 형성된 자신의 방식으로 살아가고자 한다. ‘식물해방일지’ 8편에서는 현대사회 속에서 훼손된 식물 존엄성 사례를 통해 식물을 대하는 데 있어서 인간이 가져야 할 바람직한 태도는 무엇인지 모색해 보고자 한다.
눈요기 위해 부수고 파괴하고…환경 파괴 결과물 ‘케이블카’
케이블카 산업은 환경과 경제성 사이에 놓인 가장 큰 갈등 사례로 꼽힌다. 보통 경관이 좋은 높은 산 위로 설치되는 케이블카는 지역경제 활성화를 명목으로 설치가 추진되는 사업 중 하나다. 현재 전국에는 40여개소의 케이블카가 운영되고 있으며, 현재도 케이블카 설치를 두고 갈등이 이어지는 지역이 있다.
케이블카 설치에 반대하는 환경단체들은 케이블카가 산꼭대기와 지상을 철제 인공물로 연결한다는 점에서 상부 정류장의 식생이 훼손되고 지주대 설치 과정에 지형이 파괴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들에 따르면, 케이블카가 설치된 이후 고지대 관광객 증가가 산림 생태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해외 연구 결과도 있다.
폴란드 미하우 치아흐 산림생물다양성연구소 연구원은 폴란드 남부에 위치한 타트라 산맥의 카스프로비 비에르히에 위치한 케이블카 노선이 확장된 후 알프스 산양의 생태적 변화가 감지됐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한 바 있다. 케이블카 확장 공사가 있기 이전과 후를 비교했을 때 산양의 무리 크기가 5.3마리에서 3.9마리로 줄었다는 것이다.
천연기념물 및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에 등재되면서 생태적 중요성을 인정받은 설악산에도 멸종위기 야생동물 1급으로 분류된 산양이 서식 중인데, 오색 케이블카 경로 주변으로도 산양의 서식 흔적이 확인되고 있다. 한국환경연구원은 “산양 서식지에 시설물이 설치되면 산양 서식 및 번식에 큰 교란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라며 케이블카 설치에 반대 의사를 표한 바 있다.
밀접한 생태적 고리를 형성하고 있는 산림 생태계에서 산양의 감소는 한 종의 동물이 사라지는 일시적인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산양의 배설물은 질소와 같은 영양분을 다량 포함하고 있어 이를 먹거나 옮기는 곤충들에게 중요한 먹이원이 된다. 곤충들은 이 배설물을 이동시키면서 토양에 질소를 공급하고 이로 인해 고지대 식물의 생장이 촉진된다. 결국 산양의 개체 수 감소는 고산지대 식물의 발아와 성장에 연쇄적인 악영향을 미치게 된다.
자연을 중시하는 선진국들로부터는 국립공원 내 케이블카 설치 사례를 찾아볼 수 없다. 미국의 63개 국립공원 안에는 케이블카가 설치된 사례가 없고, 이는 아름다운 자연 경관으로 잘 알려진 스위스에서도 마찬가지다. 일본도 1970년 이후로 국립공원에는 신규 케이블카는 하나도 설치하지 않았다.
하지만 국내에는 케이블카 설치 사업으로 나무와 식물을 비롯한 산림 생태계가 얼마나 훼손되는지에 관한 구체적인 연구 결과조차 전무한 실정이다. 케이블카로 인한 훼손은 단기간 내 눈에 띄지 않더라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식생 변화, 야생동물 서식지 붕괴, 토양 유실 등 다양한 방식으로 축적돼 심각한 자연 훼손을 초래할 수 있다. 전문가들은 지금이라도 생태계 전반에 미칠 영향을 정밀하게 분석하고 장기적인 환경 모니터링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식물 존엄성 선언의 제2장 식물 존중의 기본 원칙에서는 “식물의 좋음과 인간이나 동물의 좋음은 공평하게 고려돼야 한다(비례의 원칙)”고 언급한다. 이에 따르면 인간의 사소한 이익을 위해 식물의 중대한 이익을 침해해서는 안 된다. 단, 식물에 해악을 끼치는 행위는 다른 생명체의 본질적 이익을 위해 불가피할 경우 허용될 수 있다. 이에 따라 볼 때 케이블카 설치는 명백한 자연 파괴 행위이자 식물 존엄성을 훼손하는 사례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케이블카 설치는 생존 등을 위한 본질적 필요라기보다 관광과 여가의 편의를 위한 선택에 가깝다. 단순히 오락을 위한 관광이 아닌, 생태관광과 같이 존중받아야 할 생명들의 터전으로 산림을 바라보는 시각의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다.
재난이 번지다...기후위기 악순환의 결과 ‘산불’
인간이 직접적으로 나무를 베어내거나 자연을 훼손하지 않아도 식물을 해치는 경우는 생각보다 많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산불이다. 최근 국내 산림을 훼손하는 가장 큰 원인으로 꼽히는 산불은 기후위기 속에서 점점 더 거세지고 피해 범위도 넓어지고 있다.
기상청에 따르면 2024년 국내 산불 발생 건수는 2020년 대비 약 1.7배 증가했다. 특히 강원·경북 등 동해안 지역에서는 대형 산불이 반복되며 수천 헥타르(ha)에 달하는 산림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산불 대부분은 인위적 원인에서 비롯되지만, 산불이 지속되는 것은 강수량 감소로 인해 건조한 대기 상태가 지속되는 이상기후 현상 때문이다.
지난 1월 미국 LA에서 발생한 역대 최대 규모의 산불 역시 최근 겨울철 강수량의 변화로 인해 피해가 커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LA가 위치한 남부 캘리포니아 지역은 보통 1월이 우기에 해당해지만 겨울철에 내려야 하는 강수량의 약 83분의 1 수준만이 내리는 기후 변화를 겪으면서 건조한 기후를 유지해 왔다는 것이다.
지난 3월 한국에서도 경북 청도에서 발생한 산불을 시작으로 전국에 동시다발적인 산불이 일어나 10만 헥타르 이상의 임야가 전소된 바 있다. 이때 경북 북부의 소나무 숲이 대거 불탔으며 경상남도 기념물로 지정된 900살 은행나무가 크게 훼손됐다.
해당 산불로 인해 올해 1월~3월에 발생한 이산화탄소가 지난해 발생한 이산화탄소의 총량의 약 2배에 달한다는 통계도 나왔다. 국제 통계 사이트 ‘아워 월드 인 데이터’는 해당 기간 동안 한국에서 산불로 배출된 이산화탄소가 약 234만5182톤(t)으로, 지난해 전체 배출량(133만5848톤)의 1.8배였다고 밝혔다.
국립산림과학원은 주행거리가 1만5000km/년이고 에너지소비효율 등급이 1등급인 휘발유 승용차가 1년간 배출하는 이산화탄소는 1.2톤으로 집계한 바 있다. 해당 승용차 기준 올해 1~3월 산불로 인한 전체 이산화탄소 배출량은 차량 약 195만대가 1년 동안 배출하는 이산화탄소량과 맞먹는다.
이 같은 대규모 산불 재해는 단발성 피해로 그치지 않고 주변의 야생 식물 군락지와 생태계를 통째로 위협한다. 산불이 지나간 땅은 수년간 회복이 어렵고, 한 번 사라진 식생은 다시 복원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다.
이처럼 산불은 오랜 세월에 걸쳐 형성된 생태계를 한순간에 무너뜨리고 대기 중 온실가스를 폭발적으로 증가시키는 기후 재난으로 작용한다. 우리가 자연을 대하는 무관심한 태도가 식물의 존엄은 물론 인간에게도 위협으로 돌아오고 있는 셈이다.
기후 스트레스에 ‘고사’ 위기에 처한 나무들
국내 기온이 올라가면서 국내에서만 사는 토종 식물 종이 멸종 위기에 놓였다. 한라산과 지리산 등 기온이 낮은 해발 1000m 이상 고산지대에 자생하는 구상나무가 기온 상승과 수분 부족으로 인해 생장이 둔화되고 병해충의 증가로 말라 죽는 사례가 늘고 있다.
특히 지리산 반야봉 일대에 서식하던 구상나무 1만5000여 그루 중 약 절반이 고사한 것으로 조사됐다. 국제자연보전연맹(IUCN)은 2013년 구상나무를 기후변화로 자생지 분포면적이 급속히 감소한 위기종으로 분류한 바 있다.
녹색연합이 2020년부터 2022년 8월까지 약 2년 6개월간 지리산을 모니터링한 결과에 따르면 지리산 구상나무의 대표적인 집단 서식지인 동부 구간과 서부의 반야봉 일대 모두 집단 고사가 빠른 속도로 확산되고 있었으며, 이 중 고사 진행 속도가 극심한 지역은 전체 수목의 90%가량이 죽어가고 있었다.
녹색연합은 “지리산의 고산지대의 침엽수가 죽어가는 이유는 겨울과 봄의 건조, 적설량 부족, 여름철 폭염, 강풍 등으로 인한 스트레스로 보인다”며 “기온과 강수량 변화에 가장 민감하다고 알려진 산 정상부부터 해발 1700m까지는 성한 구상나무가 거의 없을 정도였다”고 강조했다.
국내 기후변화로 인한 기온 상승에 적응하지 못해 고사하는 나무는 구상나무뿐만이 아니다. 지난 1월 울진 산림유전자원보호구역을 상징하는 소나무이자 국가산림유산이던 울진 대왕소나무도 기후 스트레스를 감당하지 못하고 끝내 시들어버렸다.
대왕소나무가 아닌 금강소나무들의 집단 고사 현상도 두드러졌다. 지난해 여름 무더위를 견디지 못한 보호구역의 금강소나무 7그루는 붉게 변한 솔잎을 떨어뜨리며 생명을 다했다. 이 밖에도 강원도 삼척시에 위치한 산림유전자원보호구역의 금강소나무들도 집단 고사를 피하지 못했다.
국립공원공단(이하 공단)은 2023년 ‘국립공원 소나무 고사실태 조사 연구’를 통해 전국 국립공원의 소나무 잔존림과 고사 분포에 대한 예측 모델링을 실시했다. 그 결과, 설악산국립공원의 현존 소나무 가운데 약 47.8%가 고사하며 설악산뿐 아니라 치악산국립공원에서도 40.4%, 태백산국립공원에서도 38.5%에 달하는 소나무가 고사할 것으로 예측됐다. 특히 공단은 해당 연구를 통해 설악산과 태백산 일대를 중심으로 금강소나무의 고사 현상이 앞으로도 지속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확인했다.
숲에서 나무가 사라진다는 것은 곧 그 숲에 깃든 수많은 생명과 이야기, 그리고 자연과 공존하던 삶의 질서가 함께 사라지는 진다는 의미다. 나무를 인식하고 그들의 생태를 연구하는 일은 기후위기 대응의 또 다른 방식이며 식물도 존엄한 생명이라는 인식을 바탕으로 자연에 대한 윤리적 책임을 다하는 길이기도 하다.
식물 존중, 사라지는 산림을 향한 최소한의 예의
우리가 식물을 비롯해 인간 앞에서 침묵하는 것처럼 보이는 생물들을 오직 이용 가능한 자원으로 여길 때 만들 수 있는 피해는 상상을 초월한다. 인간이 영원한 샘물로 여기는 자연을 지나치게 착취하고 이들의 터전을 훼손할 때 그 피해는 돌이킬 수 없게 될 수 있다.
움직이는 속도가 느리고 사람을 경계하지 않았던 인도양 모리셔스 섬의 도도새는 인간에게 발견된 지 100년 만에 지구상에서 완전히 사라진 비운의 생명체로 알려져 있다. 이들을 처음 발견한 네덜란드인의 기록에는 도도새 고기가 딱딱하고 맛이 없었다고 적혀 있다.
하지만 인간은 경계심 없이 주변을 맴도는 도도새들을 이유 없이 죽였고, 선원들이 섬으로 들여온 개, 쥐 등이 도도새가 땅에 만들어둔 둥지에서 알을 훔쳐먹으면서 개체 수가 빠르게 줄어들었다. 개발로 숲이 불타면서 서식지도 줄어들게 됐다. 결국 도도새를 포함해 모리셔스 섬에 서식하던 45종의 조류 중 24종이 멸종했다.
도도새의 멸종 이야기는 모르는 사람이 없는 흔한 이야기이다. 하지만 움직임이 느리고 흔히 찾아볼 수 있기 때문에 착취의 대상이 됐다는 점에서 이들이 나무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도도새의 멸종을 안타깝게 여기면서도 무심하게 눈앞의 나무를 해치고 이들의 서식지를 파괴하는 모순적인 행위를 일삼고 있다.
지구상 현존하는 산림은 점차 사라져가고 있다. 그린피스와 메릴랜드 대학 연구팀이 2020년 제작한 야생 산림(원시림) 지도에 따르면 지난 20년간 세계 야생 산림의 약 12%가 사라졌다. 이는 대한민국의 전체 국토 면적의 약 15배에 달하는 수준이다.
식물은 인간, 동물과 함께 생태계를 공동으로 유지하는 동반자다. 식물은 인간과 동물의 생존에 필수적인 존재며, 인간과 동물은 식물에 의존적인 삶을 살아간다. 그렇기에 우리는 식물을 하나의 생명체로 바라보는 시선을 회복하고, 인간의 편의보다 더 오래된 질서인 생태계의 조화를 중심에 두고 살아갈 방법을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식물 존엄성을 실천해 이들의 생명을 존중하는 것은 궁극적으로는 인간 자신을 지키는 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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