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부터 시계 방향) 격자 무늬의 낸시 글라스, 여러 각도에서 반짝임이 돋보이는 마젠타 글라스, 로만 문양이 금장 각인된 엠파이어 잔, 커팅 기술이 돋보이는 라니 글라스는 모두 바카라 제품.
매력적인 음료와 쾌적한 공간, 정확한 서비스. 바를 찾는 이유는 저마다 다르겠지만 바에서 기대하는 기본 요소는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청담동의 바 바인하우스는 중후하고도 편안한 클래식 바다. 이곳의 편안함은 집에 있는 듯한 자유로움보다, 대도시의 혼잡함을 피해 긴 숨을 내쉬는 아늑함에 가깝다. 올해 18주년을 맞은 바는 도심과 유리된 일종의 아지트로 기능한다. 이 같은 감흥을 짙게 하는 요소는 이곳의 호스피탤리티, 대접의 감각이다. 서비스는 다소 드라이하지만, 완성도 높은 칵테일을 아름다운 잔에 서비스하는 것이 바의 철칙. 바카라 잔을 경험할 수 있는 곳으로도 잘 알려졌는데, 은은한 조명 아래 반짝이는 잔을 들어 술을 머금은 순간, 비로소 내 시간의 주인공이 된다. 아름다운 물건에는 그러한 힘이 있으니.
다양한 바카라 글라스는 김병건 오너 바텐더가 20년 이상 차곡차곡 모은 컬렉션이다. 1764년 설립된 프랑스의 크리스털 브랜드 바카라는 260년 넘는 오랜 역사만큼 진귀한 빈티지 아이템이 풍부한데, 바인하우스에서는 빈티지 잔 역시 과감하게 고객에게 내놓는다. 잔을 두고 ‘음료를 만들 때까지는 내 것이지만 완성하는 순간 손님의 잔이 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희귀한 빈티지 잔을 찾아 해외 빈티지 마켓과 온라인 중고 사이트를 탐방하는 마니아지만 그보다는 바텐더라는 점을 강조하는 32년 차 바텐더 김병건. 그가 도쿄의 바에서 처음 바카라 잔을 만났듯 누군가는 바인하우스에서 크리스털 잔의 아름다움에 눈뜬다.
1 아코어 잔에 칵테일을 따르는 김병건 바텐더. 2 바인하우스의 백 바. 다양한 바카라 잔이 가득하다.
바카라 잔을 처음 접한 건 언제인가? 수집을 시작한 계기가 궁금하다.25년 전 도쿄의 한 바에서 견습생으로 근무하던 시절이다. 그때는 돈도 없었고 긴자의 바에 가려면 거의 2주치 월급을 모아야 했지만 한 달에 한두 번은 손님으로 방문하곤 했다. 당시 갔던 바에서 바카라 잔에 칵테일을 내주었는데 대접받는 기분이었다. 잔이 중요하다는 걸 깨달은 순간이다. 이후 한국에 돌아온 뒤 2002년경부터 잔을 하나둘 사 모으기 시작했다. 손님을 위한 최고의 서비스는 그들을 귀하게 여기고 잘 응접하는 것이다. 집에 귀한 손님이 오면 어머님이 있는 줄도 몰랐던 좋은 접시에 음식을 준비하는 것처럼. 좋은 잔에 마시면 기분이 더 좋아지지 않나. 물론 음료를 맛있게 만드는 건 기본이다. 다만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에서 고급 기물을 사용하듯 내 음료의 격에 어울리는 잔을 사용하는 것이다. 멋지고 매력적인 칵테일을 만든다면 그 매력을 돋보이게 하는 아이템 중 첫 번째가 글라스웨어라고 생각한다.
많은 글라스 브랜드 중 왜 바카라인가? 크리스털은 산화칼륨을 사용해 투명도와 굴절률이 높은 유리를 뜻한다. 바카라는 260년 넘은 브랜드답게 노하우가 남다르다. 우아하고 중후한 디자인이 우리 바와 어울린다.
백 바에 바카라 잔이 가득하다. 컬렉션 규모는 어느 정도인가? 300점이 넘은 뒤로 세세히 세는 걸 멈췄다. 깨지면 사는 일을 반복하고 있어서(웃음). 이번 기회에 대략 파악해보니 백 바에 약 350개가 있고, 창고에 포장을 뜯지 않은 상자째로 50개, 집에 100개 정도 있는 듯하다.
잔이 자주 깨지나 보다.바카라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디자인 중 라니(lagny) 라인이 있다. 커팅 가공 기법으로 만든 기본 잔으로, 투박해 보여도 개인적으로 좋아한다. 컬렉션 중 일부 디자인은 단종됐지만 여전히 출시된다. 이상하게도 직원이든 손님이든 이 잔을 가장 많이 깬다. 지금까지 8번 정도 깨졌다. 잔마다 칵테일이 정해져 있는데, 마티니와 김렛은 무조건 이 잔에 서비스한다. 대표적인 클래식 칵테일인 만큼 깨져도 계속 들일 수밖에 없다. 10여 년 전에는 그나마 쉽게 구할 수 있었는데 최근 찾아보니 훨씬 구하기 어렵더라. 시간이 갈수록 이 잔의 가치를 알아보는 사람이 많아졌다는 의미다.
3 도쿄 빈티지 숍에서 구한 마젠타 잔. 4 격자무늬가 특징인 낸시 글라스.
잔은 주로 어디서 구입하나? 다른 사람들처럼 서울의 메종 바카라나 신세계백화점 강남점 매장에서 많이 구입한다. 해외 여행을 가서도 매장에 자주 들른다. 빈티지 잔은 세컨드핸드 마켓에서 주로 찾는다. 각 나라의 벼룩시장과 빈티지 숍, 특히 런던, 파리, 도쿄의 숍에서 하나하나 찾는 재미가 있다. 한 번은 도쿄 다이칸야마의 앤티크 숍에서 1940~1950년대 생산된 마젠타(magenta) 잔을 구한 적이 있다. 처음에는 주인장이 팔지 않으려 하더라. 설득 끝에 결국 팔기로 했는데 주인장이 가격을 높게 불러 당시에는 사지 않겠다고 나왔다. 빈티지 아이템은 부르는 게 값이라 협상과 협의가 필요하다. 3~4일 일정 중 매일 한 번씩 들르며 끈질기게 설득했고, 여행 마지막 날 중간 가격에 합의를 봐 어렵게 손에 넣었다. 마젠타 시리즈를 몇 개 갖고 있었기에 정말 사고 싶은 잔이었다. 수집가 중에는 소장했다는 사실을 중요시하는 사람이 있고, 구하는 과정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다. 나는 가치와 의미, 둘 다 담긴 잔을 좋아한다. 스토리가 담긴 잔에 애착이 간다.
그렇다면 잔을 하나씩 살펴보자. 가장 오래된 빈티지 잔은 무엇인가? 바카라 크리스털 중 금장 각인된 잔들을 엠파이어 스타일이라고 한다. 어느 브랜드나 그렇지만 금을 가공한 잔은 고가다. 수집품 중 1919년 생산된 로만 문양의 엠파이어 잔은 공식적으로 가장 오래됐다. 수집가 커뮤니티나 옛날 카탈로그를 보며 기록을 찾고 공부하는 재미가 크다.
소장품 중 희소가치가 높은 잔이 있다면? 넝쿨 문양이 새겨진 로한(rohan) 라인은 바카라의 애시드 에칭 가공 기법을 대표하는 아이코닉 디자인이다. 로한 시리즈 중 20세기 초에 잠깐 생산된, 스템이 짧은 와인잔을 갖고 있다. 실용성은 낮지만 보기 드문 디자인이라 수집가 사이에서 고가로 거래된다. 보유한 잔 중에서 가장 희소하지 않나 싶다.
5 고객에게 선물 받은 피카츄 크리스털 피규어. 6 위스키 베이스의 클래식 칵테일 사제락을 아코어 잔에 담았다.
시기마다 좋아하는 잔이 달라질 것 같다. 지금 가장 애정이 가는 잔은 무엇인가? 최근 가장 많이 모은 잔은 아코어(harcourt) 라인이다. 1841년 탄생한 디자인으로, 바카라의 근간이라 해도 무방하다. 팬데믹 이후로 바인하우스 칵테일의 맛이 더 진하고 풍성해졌다. 볼륨감 있는 음료와 어울리는 우아하고 중후한 잔을 찾다 보니 자연스레 아코어 라인에 눈길이 갔다.
바텐더에게는 아름다운 글라스도 영감의 원천일 것 같다. 잔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칵테일이 있는지? 베가(véag) 시리즈의 컬러 마티니 글라스에서 영감을 얻어 창작 칵테일을 개발했다. 이름은 ‘리틀 블랙 자켓’이다. 2012년 서울에서 디자이너 칼 라거펠트의 사진전이 열렸는데, 그 전시 제목이 <리틀 블랙 자켓>이었다. 바카라 매장에서 이 잔을 보니 라거펠트의 전시가 떠올라 블랙 커피 칵테일을 구상했고 빨간 잔에 검은 음료를 담는 비주얼을 떠올렸다. 스페셜티 커피 콜드 브루 원액을 활용한 에스프레소 마티니 스타일의 칵테일이다. 이 칵테일로 ‘글렌피딕 페스티벌’ 2위를 차지했다.
크리스털 잔을 관리하는 노하우를 공유한다면? 크리스털은 고온과 습기에 약해서 식기세척기 사용은 금물이다. 물에 계속 담가두면 뿌옇게 변색되니 물기는 즉시 닦아야 한다. 설거지할 때는 부드러운 셀룰로스 스펀지로 닦는 것을 추천한다. 또 잔끼리 부딪치면 깨지기 쉬우니 하나씩 싱크대에서 세척하라고 직원들에게도 당부한다.
7 도쿄 긴자의 바카라 스토어에 줄 서서 구매한 바카라 250주년 한정판 텀블러. 8 크리스털 잔은 즉시 닦아서 관리하는 것이 중요하다.
20년 넘게 수집해온 바라카 잔은 어떤 의미인가? 어마어마한 의미를 담으려 하지 않는다. 늘 사용하는 잔이기 때문에 의미를 담기 시작하면 지나치게 신경 쓸 것 같다. 서비스할 때마다 누군가 잔을 깨지 않을까 노심초사하고 싶지 않다. 처음부터 손님에게 내놓기 위해 잔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래서 경험을 선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잔을 살 때 고려하는 첫 번째 조건은 ‘즉시 사용 가능한가’다. 찬장에 모셔두는 관상용 잔이라면 순위가 뒤로 밀려난다.
보통 수집가와는 목적이 다르다. 그렇다면 바텐더로서 잔을 모으는 기쁨은 무엇인가? 바카라 잔을 계속 사용하는 궁극적인 이유는 손님을 더 돋보이게 하고 싶어서다. 상상해보면 수십 년 전 잔이 만들어졌을 때도 그저 장식장에 있기를 원하지 않았을 것 같다. 크리스털 잔들도 찬장에 있다 버려지기보다 잘 쓰이다가 깨지는 편을 바라지 않겠나. 무언가를 담는 것이 잔의 존재 이유다. 그러니 이 잔을 손님이 사용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좋다. 커플 손님이 오면 종종 잔 사진만 찍지 말고 잔을 든 상대방을 찍으라고 권한다. 이전에는 잘 만든 음료와 거기에 어울리는 잔이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30년 넘게 바텐딩을 하다 보니 손님이 그 잔을 들고 마셨을 때 비로소 퍼즐이 완성되는 걸 알겠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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