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집자 주 = 한국국제교류재단(KF)의 지난해 발표에 따르면 세계 한류 팬은 약 2억2천5백만명에 육박한다고 합니다. 또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초월해 지구 반대편과 동시에 소통하는 '디지털 실크로드' 시대도 열리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한류 4.0'의 시대입니다. 연합뉴스 동포·다문화부 K컬처팀은 독자 여러분께 새로운 시선의 한국 문화와 K컬처를 바라보는 데 도움이 되고자 전문가 칼럼 시리즈를 준비했습니다. 시리즈는 매주 게재하며 영문 한류 뉴스 사이트 K바이브에서도 영문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 '정'의 발음
'正'은 '바르고 곧다'라는 뜻이다. 正은 긴 발음으로 [정:]이다. 정말은 正+말이다. '전혀(全)-', '도저히(到底)-', '기어코(期於)-'처럼 한자어와 우리말의 합성어다.
어쨌든 표준발음은 [정:말]이다. 正直[정:직], 正確[정:확], 正正堂堂[정:정당당] 해야 올곧게 들린다. 정조(正祖) 임금도 [정:조]다.
正은 또한 설날을 한자로 원정(元正)이라 하듯 '시작'의 의미가 있다. 또한 정정(訂正)에서 보듯 고쳐서 새로이 한다는 뜻을 품는다. 시작의 의미를 갖는 '정월(正月)', '정초(正初)'는 예외적으로 짧게 발음한다. [정월], [정초]다.
고유어 '정'은 대표적으로 돌을 쪼는 연장의 '정'과 '정 그러시겠다면' 할 때의 '정'이 [정:]으로, 둘 다 길게 발음한다. 길 것 같은데 짧은 '정'도 있다. 정통(精通), 정밀(精密), 정중동(靜中動), 정상참작(情狀參酌) 등이다.
지명, 자연물 이름 중 강원도 정선군(旌善郡)은 짧고, 천안-논산 간 도로를 관통하는 정안면(正安面)은 길다.
일산 정발산(鼎鉢山), 제주 정방폭포(正房瀑布)도 길게 소리 내야 맞는다.
정관장(正官庄)도 긴 발음이다. 뜻은 관(官)의 장원(莊園), 전장(田莊)에서 만든 바른(믿을 수 있는) 홍삼이란 의미다. 과거 가짜 고려삼과 구별하기 위해 실제 이렇게 썼다고 한다. '장'(庄)은 '장'(莊)의 속자(俗字)다.
반면 정로환(征露丸)은 짧다. 일본이 러일전쟁을 치를 때 병사들이 더러운 물 때문에 배탈이 날까 봐 만든 약이다. 러시아, 즉 '로서아'(露西亞)를 정벌(征伐)하기 위해 만든 약이라는 의미다.
인명(人命) 중 성씨(姓氏)는 크게 나라 '정'(鄭)과 고무래 '정'(장정 정,丁)으로 나뉜다. 정씨(鄭氏)는 200만 남짓 인구를 자랑하는 5위 대성(大姓)이다.
주요 성씨 가운데 유일하게 장고모음(長高母音)이라 특히 유의미하다. 낮고, 깊고, 길게 소리 내야 제대로 발음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상대적으로 혀끝의 위치를 보통 [ㅓ]보다 높게 잡고 턱을 앞으로 약간 내밀 듯해야 한다. [정:]은 거의 [즈:엉] 이라 생각하면 수월하다. 정:도전, 정:몽주, 정:선(겸재), 정:철(송 강) 모두 정가(鄭家)다.
또 다른 정씨(丁氏)는 35∼36위권이다. 앞의 나라 정씨와는 달리 짧게 발음한다. 그래서 의미 있다. 가장 유명한 이는 다산(茶山) 정악용(丁若鏞) 이다. 그러니 [정:야굥]이 아니라 [정야굥]이다. 鄭과 대비되게끔 짧게 소리 내야 옳다.
참고로, '정녕 가시렵니까?'에서 '정녕'은 고유어 같지만, 한자 '정녕'(丁寧)이다. 덴마크의 가차음(假借音), 음역어(音譯語)는 '정말'(丁抹)이다.
◇ '거'와 '거:'
거리.
이 단어의 발음 하나만으로도 언어 감각, 소리의 감수성을 알 수 있다. 일반 시민이 [거:리]라고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으로 길게 소리 낼 때 일종의 경외감을 갖는다.
그렇다! 긴 발음 [거:리]는 distance, '간격'이다.
짧은 [거리]는 street, '길'이다. 이걸 모르더라도 감각적으로 street와 distance를 구분해야 할 것 같다는 느낌의 탑재가 소중하고 가치 있다.
하물며 전문 방송인이 이 간격의 [거:리]를 [거리]로 짧게 무심히 발음하는 걸 목격할 때면 안타깝고 불편하다.
'길고/낮고/ 깊게' 발음하는 [ㅓ:]의 존재를 의식했으면 한다. [언:제] [얼:마나] [커:다랗다] [천:천히] [덜:] [먼:(곳)] [(눈에)선:하다] [(돈)벌:다] [(양이)적:다] [헌:(옷)] [걷:기] 등 고유어만 해도 수도 없이 많다.
기술적으로는 입 안 혀의 위치를 약간 높이고, 턱을 살짝 든다고 생각하면 어느 정도 발음의 모양이 만들어진다.
[ㅓ:] 소리를 어떻게 구사하는가는 어쩌면 언어적 감수성 영역의 교양인임을 판단하는 기준 중 하나일 테다.
[거:]는 장고모음(長高母音)이라는 정체성을 지닌다. 소리는 길고, 깊고, 낮게 들리지만, 그 소리가 나는 입안, 혀의 위치는 상대적으로 높다는 의미다.
짧은 [거]보다 혀의 위치가 높은 데서 출발한다는 말이다. 우리의 입 모양은 옆으로, 가로로 만들수록 아래턱이 조금 나오면서 혀끝은 올라가는 특징이 있다.
주의할 점은, [거:]는 '거'를 물리적으로 그저 길게 늘이는 것이 아니라, 아예 다른 음을 낸다고 여기라는 것이다. 영어로 따지자면 early pearl의 [어r] 소리에 근접한다.
중장년층 중 어느 정도 발음 감각을 탑재한 이들은, 그러나 과도한 [어:]를 유의해야 한다. 바로 [으]까지 전이되는 현상이 발생하곤 하기 때문이다. 가령 [거:지]의 경우, 어떤 이는 과욕을 부린 탓에 [그:지]로 발음하기 일쑤며 그것이 체화되는 불운을 맞는다.
이건 혀끝을 너무 올린 탓에 빚어지는 비극이다. [증: 말] [은:제] [그:짓말] [드:러워] [승:질] 등의 오발음(誤發音)도 같은 경우다.
'거'는 유난히 긴 발음이 많다. 디테일을 추리면 다음과 같다.
巨(거)는 감각적으로 길게 하고픈 느낌이 들지 않나?
[거:부](巨富), [거:액](巨額), [거:장](巨匠) 등이다. 지명으로는 [거:여동], [거:문도], [거:차도], [거:진항], [거:잠포] 등이 있다.
擧(거)도 길다.
거동(擧動) 거론(擧論) 거행(擧行)은 [거:동], [거:론], [거:행]이라고 해야 근사하게 들리리라.
拒(거)도 중요하다. [거:부](拒否), [거:절](拒絶), [거:역](拒逆)이다. [거:래](去來), [거:취](去就), [거:두절미](去頭截尾) 등에서의 거(去)도 길다.
마지막으로 [거:점](據點)의 거(據)까지 섭렵하면, 웬만한 긴 [거:]는 마스터했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러나 짧은 '거' 몇몇이 도사리고 있다.
여기부터는 남다른 전문성이 필요하다. 상식이라고 여겨지는 것들과 다른 게 많기에 그렇다. 거(居)가 대표적인데 놀랍게도 짧게 소리 난다.
거실(居室), 거중조정(居中調整), 거지반(居之半), 거주지(居住地) 등이 그 예다. 지명으로는 경남 거창군(居昌郡)과 전남 거금도(居金島)가 여기에 속한다. 상환(償還)과 짝을 이루는 단어 거치(据置)와 물건을 지탱하는 거치대(据置臺)도 같은 거(据)를 쓰며 짧게 소리 난다.
강성곤 현 KBS 한국어진흥원 운영위원
▲ 전 KBS 아나운서. ▲ 정부언론공동외래어심의위원회 위원 역임. ▲ 현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언어특위 위원. ▲ 전 건국대·숙명여대·중앙대·한양대 겸임교수. ▲ 현 가천대 특임교수.
* 더 자세한 내용은 강성곤 위원의 저서 '정확한 말, 세련된 말, 배려의 말', '한국어 발음 실용 소사전'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정리 : 이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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