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신문 김효인 기자】 퇴직연금 적립금이 400조원을 넘어섰지만 수익률은 낮고 중도해지 시에는 턱없이 높은 손실로 이어지는 등 국민 노후자산 역할을 제대로 못 하고 있다는 비판이 커지고 있다. 대안으로는 현재 적용되고 있는 계약형 구조 대신 기금형으로의 전환이 지목되지만, 제도 복잡성 등 현실적인 어려움에 처한 상황이다.
19일 금융권에 따르면 최근 5년간 국내 퇴직연금의 연평균 수익률은 2.3%에 그친 것으로 드러났다. 국민연금이나 미국·호주 등 선진국 퇴직연금이 7~8%대 수익률을 내고 있는 것과 비교하면 국내 퇴직연금의 성적표는 초라하다.
배경으로는 근로자와 기업이 금융사와 직접 계약을 맺고 운용하는 계약형 구조가 꼽힌다. 투자 경험 등 정보 비대칭과 소극적 운용이 반복된다는 점에서다. 실제 전체 퇴직연금 적립금의 89%는 예·적금 등 원리금보장 상품에 쏠려 있어 실질 수익률이 물가상승률에도 못 미치는 경우가 많은 점, 종신연금 대신 일시금으로 찾는 가입자가 많다는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중도해지·이전의 함정…커지는 ‘손실폭탄’ 우려
퇴직연금의 구조적 문제는 중도해지나 금융사 이전 시 더 두드러진다. 원리금 보장 상품이라도 만기 전에 해지하거나 금융사 간 이전을 하면 약속된 금리의 절반 이하로 이자가 깎인다.
연 5% 금리로 가입했더라도 중도 해지 시 2.5% 수준만 받을 수 있고, 기대했던 이자 수익보다 절반 이상 손실되는 경우도 있다.
퇴직연금 수익률을 높이기 위해 도입된 사전지정운용제도(디폴트옵션) 상품 역시 예외는 아니다. 만기 전 이동하면 기존보다 낮은 금리가 적용돼 이중 손실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IRP(개인형퇴직연금) 역시 55세 이전에 해지하면 그동안 받았던 세액공제 혜택을 모두 반납해야 하고, 16.5%의 기타소득세까지 내야 한다. 실제 퇴직연금 중도 인출 사유의 88% 이상이 주택 구입 등 불가피한 경우지만, 이때도 퇴직소득세와 기타소득세 부담이 동시에 발생한다.
이런 손실 위험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금융사 권유에 따라 계좌를 옮겼다가 예상치 못한 손해를 입는 사례도 적지 않다. 이에 일부 금융사는 계약 이전을 통한 수수료 수입에만 치중한다는 비판도 나온다.
한 금융업계 관계자는 “금융권 경쟁에 일부 소비자들이 피해를 입으면서, 노후 안전망이 돼야 할 퇴직연금이 손실 폭탄이 될 수 있다는 불만이 커지고 있다”며 “중도 해지 시 손실은 물론이고 이를 줄이기 위해 도입한 ‘실물이전’ 제도 역시 아직 실효성이나 소비자 보호 측면에서 개선해야 할 점이 많다는 지적이 있다”고 짚었다.
선진국에선 주류인 ‘기금형 구조’…이해관계에 더뎌지는 논의
정부와 전문가들은 낮은 수익률과 구조적 한계를 타개할 해법으로 기금형 퇴직연금 도입을 꾸준히 강조해왔다. 실제 고용노동부는 전문가 자문단을 꾸리고, 기금형 제도 도입을 위한 법안 발의와 제도 설계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기금형은 투자 전문가가 적립금을 통합 운용하는 방식으로, 대규모 자산을 장기·분산 투자해 운용비용을 낮추고 수익률을 높일 수 있다는 평가다. 호주와 미국 등 선진국에서는 이미 기금형이 주류로 자리 잡은 상태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금융업계의 반발과 제도 설계의 복잡성, 이해관계자 간 조율 문제 등으로 논의가 지지부진하다. 일괄적으로 기금형을 적용하기엔 기업 규모와 업종별 현실이 너무 다르다는 실무적 난점도 크게 작용한다.
보험업계 관계자는 “은행·보험·증권 등 기존 금융권의 경우 시장질서가 무너질 수 있다는 점 등에 비춰 국민연금 등 공적기금의 시장 진입은 신중해야 한다는 의견이 우세하다”며 “특히 퇴직연금은 국민연금과 달리 가입자가 투자 기간을 직접 정할 수 있어 초장기 운용이 어렵다는 점, 각 업종별 처한 상황이 다르다는 점도 난제”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금융권 이해관계를 넘어 노후 소득 보장 강화 목적에 충실한 기금형 도입이 시급하다는 입장이다.
김태일 고려대 행정학과 교수는 최근 ‘기금형 퇴직연금 도입의 쟁점’ 주제 발표에서 “퇴직연금은 노후 소득 보장 기능을 거의 못 하고 있다”며 “기금형 도입 논의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라고 강조했다.
이어 “기금형 도입은 단순히 제도를 바꾸는 것을 넘어 금융기관의 이해관계가 아닌 근로자의 노후 소득 보장 강화라는 본래 목적에 충실해야 한다”고 부연했다.
김재현 상명대 글로벌금융경영학부교수(전 한국연금학회장)도 “퇴직연금의 저조한 수익률과 구조적 한계는 단순히 공적·사적 제도의 차이가 아니라 지배구조에서 비롯된다”며 “퇴직연금에서도 기금형을 도입해 국민연금이 지닌 장점이 발휘되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정부뿐 아니라 민간도 퇴직연금기금을 설립해 성과로 평가받는 경쟁 시장을 조성해야 하며, 기금형 도입과 함께 다양한 대체투자 확대를 통해 국민연금 수준의 운용성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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