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건호의 예술의 구석] 어쩌면 프롤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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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건호의 예술의 구석] 어쩌면 프롤로그

문화매거진 2025-04-16 13:19:56 신고

▲ 어쩌면 프롤로그 / 그림: 윤건호
▲ 어쩌면 프롤로그 / 그림: 윤건호


[문화매거진=윤건호 작가] 잔가지같이 무수한 길도, 탄탄대로의 넓직한 길도 멀리서 보면 선이라. 어쩌면 우리는 연필이고 발밑에 그림자는 흑연이라. 형태, 규모가 어떠한들 걷는 것은 내 발이고 남겨지는 자욱은 짙고 선명하다. 그림이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안양이 싫었다. 학교에서 ‘일진 놀이’하던 학우가 딱지치기를 져놓고 그 딱지를 내놓지 않았던 순간. 등굣길, 양아치 듀오가 뻐기는 나 대신 동생을 건드리며 돈 내놓으라던 순간. 주점 화장실에서 만취한 트리오가 자기한테 불만 있냐며 시비 걸던 순간. 뭔 놈의 동네가 이러냐… 너무 싫었다.

내 눈을 비추는 안양의 하늘은 언제나 회색빛이었다. 울창한 건물 숲을 지나 그 너머로 가면 낭떠러지가 있을 것만 같았다. 근데 짙은 것만 같던 그 선들이 알고 보니 빗그어진 선들이었나, 요즘엔 점차 흐려진다.

동생들과 동네를 누비며 ‘경찰과 도둑’을 하던 순간. 아침이 되는 보랏빛 하늘을 등굣길 공원에 누워 친구들과 바라봤던 순간. 부모님과 해장국을 먹던 순간. 연인을 만난 순간. 어느샌가 내가 떠올리는 안양의 하늘은 푸른색이 되었고, 지금은 무지개도 있었던 것 같다.

▲ 나의 선들 / 그림: 윤건호
▲ 나의 선들 / 그림: 윤건호


시간은 그냥 지나간 적이 없었다. 순간순간들은 여러 색을 가지고 있었고 여러 방향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아직 둔해서, 한 번의 걸음에 그것들이 다 담겨있다는 걸 그림을 그리며 눈치챈다. 한 번의 그음에 생각하고 한 번의 붓질에 떠올린다. 어떤 붓질은 “아, 망했다” 생각하고 어떤 붓질은 “오우, 좀 잘하는데” 생각하는데, 그 모든 게 한 점의 그림을 그릴 때 일어난다는 게, 매번 몇 번의 방황으로 롤러코스터를 탄다는 게 웃기는 부분이다.

아직도 그림 그리는 과정이 일정하지 못하고, 아직도 구상이 오래 걸리는 나. 아직도 하루걸러 그림이 맘에 안 들고, 아직도 그림이 재밌는 나. 나는 아직 그림을 다 못 그린 거다.

바쁜 일상은 같아 보여도 매번 새로운 것이고 항상 다른 선이다. 당장 그 색이 안 보여도 곧 파란색도 보이고 주황색도 보이고 하며 그림이 그려질 것이다. 해서, 무채색 같던 시간 속에서 그려낸 이 선들은, 어쩌면 내 순간순간의 프롤로그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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