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4월, 라일락이 만개하는 시즌이면 나무 그늘 아래서 온갖 잔치가 펼쳐진다. 춤을 추듯 이동하는 잔치는 골목 구석구석 작은 식당에서부터 시작된다. 풍요로운 음식과 와인,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는 가족과 친구들. 따스하게 영혼을 감싸는 소박하나 잔치 같은 식사 시간은 빌리 홀리데이의 노래 가사처럼 애틋한 그리움을 품고 있다.
청담동 한가운데 위치한 오니바(Onyva)로 향하는 익숙한 계단은 언제나 가벼운 발걸음으로 이어진다. 가까운 이들과 좋은 음식, 대화를 나누다 보면 어느덧 분주한 서울의 일상에서 쌓인 고민거리는 비워지고 봄날의 파리와 연결된 듯 생동감 넘치는 에너지로 채워지니까.
네오 비스트로에서 영감 받은 오니바의 메뉴는 매 시즌 다채롭게 변주된다. 2000년대 파리에서 시작된 네오 비스트로 운동은 고급 레스토랑의 주방을 떠난 젊은 셰프들이 작은 비스트로를 열고, 농장에서 수확한 신선한 재료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가정식 요리를 선보이며 전성기를 열었다. ‘미식을 대중에게’라는 철학 아래 파인다이닝의 엄격한 드레스 코드와 서비스 대신 더욱 활기차고 즐거운 분위기 속에서(포멀한 셰프 재킷 대신 캐주얼한 복장으로 일하며) 고객과의 장벽을 낮추고 친근하고 소탈하지만, 보다 자유롭고 창의적인 요리를 전개한 것이다.
클래식한 파인다이닝 요리가 버터와 크림, 와인과 진한 육수를 바탕으로 묵직한 풍미를 담아낸다면, 네오 비스트로 셰프는 재료 본연의 맛을 살리는 가벼운 조리법을 선호한다.제철 채소와 허브를 주역으로 전통적으로 곁들이던 무거운 소스는 최소화하는 경향을 보인다. 고급 음식의 민주화라는 취지로 시작된 파리의 네오 비스트로 운동을 통해 더 많은 이들이 창의적이고 수준 높은 음식을 경험하게 됐다.
이냐키 아이즈피타르트 셰프는 네오 비스트로 움직임의 선구자로 꼽힌다. 파리 11구에 위치한 르 샤토브리앙(Le Châteaubriand)은 프랑스 전통 요리를 과감히 해체하고 재구성했다. 피카소의 입체주의나 아방가르드 영화를 처음 접한 이들이 이런 충격을 받았을까? 미소 된장국에 띄워낸 푸아그라, 참깨 페이스트를 잔뜩 묻힌 생조개라니! 돼지구이에 곁들인 셀러리 뿌리, 감칠맛을 더하는 감초 소스 같은 이색적인 조합은 이산화황이나 화학첨가물을 최소화한 내추럴 와인과 매칭되었다. 대중은 이렇듯 대담하고 혁신적인 음식에 열광적인 반응으로 화답했다.
언뜻 프렌치 다이닝을 급진적이고 난해하게 재구성한 것처럼 보이는 새로운 메뉴들은 매우 조화로운 맛을 낸다. 르 샤토브리앙의 시그너처 디저트 ‘토시노 델 시엘로’는 달걀노른자를 설탕 시럽에 절여 바삭한 머랭 위에 올린 것으로, 스페인과 프랑스의 조리법을 혼용한 레시피가 특징이다. 여러 방식을 혼합한 요리는 전통 파인다이닝 조리법을 따르며, 기본에 어긋나지 않는 딱 맞는 익힘과 밸런스로 완성한다.
서울에서 네오 비스트로를 처음 연 곳은 2014년 처음 서래마을에 등장한 제로컴플렉스(Zero Complex)가 아닐까 한다. 그전까지 서울의 프렌치는 오랜 기간 호텔 레스토랑 중심의 격식 있고 값비싼 양식으로 인식되었다. 르 샤토브리앙에서 오랜 경력을 쌓은 이충후 셰프는 당시 서울에서는 다소 낯선, 혁신적인 다이닝을 전개하며 주목받았다. 스테인리스를 메인으로 한 미니멀한 인테리어 또한 마치 실험실 같은 파격적인 무드가 인상적이었다.
잘 구운 북방조개 관자는 식감 좋은 보리와 톳 등의 해조류를 곁들여 바다 향이 가득하면서도 스모키한 풍미를, 크리미한 하얀 요거트 무스 주변을 장식한 새 둥지 같은 허브는 신선하고 독창적인 디저트를 완성했다. 메뉴판에는 ‘갑오징어 먹물 옥수수’, ‘대구 아스파라거스 바질’ 같은 재료들이 나열되어 있고 내추럴 와인과 페어링되었다. 무겁고 불필요한 요소를 최소화해서인지 신선한 식재료 고유의 맛이 조화로웠다.
오니바 또한 이런 정신을 계승해 현재 서울에서 네오 비스트로의 움직임을 가장 잘 관찰할 수 있는 곳 중 하나다. 소규모 농장에서 직접 재배한 채소와 허브 그리고 제철 식재료를 이용해 재료 본연의 섬세한 맛을 미니멀한 프레젠테이션에 담아낸다. 오랜 기간 르 샤토브리앙과 그 자매 식당인 르 도팽(Le Dauphin)에서 경력을 쌓은 박진용 세프는 자연주의적이고 트렌디한 방식으로 클래식에 기반을 둔 재치 있는 요리를 선보인다. 제철을 맞은 뿔소라는 에스카르고보다 진한 풍미를 자랑하고, 신선한 채소 요리들은 감칠맛으로 가득하다. 표면에 자갯빛이 도는 생선 요리는 산뜻한 소스를 더해 딱 알맞은 익힘으로 마무리된다. 각기 다른 식감이 흥미로운, 부위별로 프레젠테이션한 오리 요리와 제철 채소는 한국 식재료에 대한 애정을 고스란히 전달한다.
좋은 음식을 먹으며 나누는 대화나 그 시간이 주는 기쁨은 오랫동안 기억되고 추억으로 저장된다. 맛과 향, 때로는 음식이 담긴 모양을 통해 전해지는 감동은 대개 가장 개인적인 이야기에서 시작된다. 어린 시절 할머니가 해주시던 음식, 여행지에서 처음 맛본 낯설지만 잔상이 남는 음식, 힘든 일이 있었을 때 따뜻한 위안을 준 음식 등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 속에서 마음을 울린다.
오늘날 국경과 지역을 넘어 다양한 음식이 섞이고 있다. 수많은 셰프들이 고향에 기반을 둔 레시피를 펼친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라는 거장의 명언은 미식 세계에도 예외 없이 적용된다. 셰프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였고, 본인의 고향에서 계절에 맞는 신선한 재료를 찾았다. 그런 개인적인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것이 미식의 또 다른 즐거움 아니겠는가.
Zero Complex
1 양배추, 홀랜다이즈, 초당옥수수로 만든 소스가 계절감을 드러낸다.
2 아뮈즈부슈-한 입 거리들.
3 요거트, 서양배, 타임을 이용해 상큼한 디저트.
4 왕우럭조개, 남새초, 보리로 제철을 맞은 재료 본연의 맛을 강조한 유니크한 타르트는 제로 컴플렉스의 시그너처 메뉴.
ONV
1 딸기 소르베, 오미자, 후추 머랭을 조합해 한국적인 재미를 느낄 수 있다.
2 메밀, 김을 곁들인 들기름 향으로 가득한 들깨 아이스크림은 부드러우면서도 강렬한 맛이 특징이다.
3 다양한 토마토의 향을 제철 허브와 조화롭게 버무렸다.
4 울진 박달대게, 토종 싱아, 와인버터 소스 등 의외의 내용물이 비밀스럽게 숨어 있어 즐거움을 주는 디시. 대게의 바다 향이 뭉근한 와인 소스와 잘 어울린다.
더네이버, 라이프스타일, 다이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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