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스경제=임준혁 기자] 중국의 해운·조선산업을 와해시키려는 미국의 견제 정책이 매서워지고 있는 가운데 그동안 가격 경쟁력을 갖춘 중국 조선소에 발주를 많이 해오던 글로벌 선사들도 이를 의식해 최근 신조 행선지로 한국을 선택하는 경향이 점차 선명해지고 있다.
최근 미국 무역대표부(USTR)가 내놓은 중국산 선박의 미국 항만 입항 시 수수료 부과 방안이 현실화 단계에 진입한 만큼 한국 대형 조선사가 반사이익을 얻을 공산이 커지고 있다. 실제 한화오션과 삼성중공업이 ‘어부지리’로 이득을 볼 가능성이 매우 임박한 상황이다.
1일 업계에 따르면 미국 에너지 기업 엑손모빌은 중국 조선소에서 건조할 예정이던 액화천연가스(LNG) 벙커링선 신조 계약을 파기하기로 했다. 엑손모빌은 지난 2월 2만㎥급 LNG 벙커링선 2척을 건조할 슬롯(도크를 비롯한 배를 지을 수 있는 생산설비)을 중국 조선소를 통해 확보했으며 조만간 공식 입찰을 실시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엑손모빌은 슬롯을 확보하는 이 옵션을 끝내 행사하지 않았다. 지난달 24일 열린 USTR 공청회 이후 중국산 선박 건조 주문이 취소된 첫 사례다.
업계에서는 중국 조선사들에 발주를 낸 글로벌 선사들이 과도한 수수료를 물지 않기 위해 계약 자체를 취소하는 사례가 이어질 수 있다고 본다.
이와 관련 한 조선업계 관계자는 “이번에 엑손모빌이 발주를 취소한 LNG 벙커링선은 중국과 한국 조선소에서만 건조할 수 있어 한국으로 물량이 올 수 있다”면서도 “현재 국내 대형조선소는 3년 치 이상의 일감이 쌓여 있어 슬롯 확보도 쉽지 않은 상황”이라고 전했다.
한화오션과 삼성중공업은 글로벌 선사들의 이른바 ‘중국 조선소 스킵’ 현상에 따른 반사이익을 피부로 체감하고 있다.
한화오션은 오세아니아 지역 선주로부터 초대형 원유운반선(VLCC) 2척을 3784억원(약 2억5740만달러)에 수주했다고 1일 공시했다. 공시에 따르면 인도 시기는 2027년 5월 말이다. 업계에서는 이날 공시 이전부터 한화오션이 그리스 선사 캐피탈 쉽 매니지먼트(캐피탈)와 동형선 2척에 대한 건조의향서(LOI)를 체결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한화오션의 이번 VLCC 수주에서 눈여겨 볼 대목은 캐피탈의 최근 유조선 신조 발주 전략에 주목할 만한 변화가 감지됐다는 데 있다. 캐피탈은 지난 수년간 VLCC를 포함해 수에즈막스급 원유운반선, 아프라막스급 원유운반선 발주 시 중국 조선소를 선호해왔다. LNG운반선 등 가스선 건조에만 한국 조선소를 찾은 것으로 전해졌다.
캐피탈뿐만이 아니다. 독일 정기선사 하팍로이드(Hapag-Lloyd)도 같은 이유로 한화오션에 러브콜을 보내고 있다. 노르웨이의 조선·해운 전문 매체 트레이드윈즈는 지난 2월 한화오션이 하팍로이드와 LNG 이중연료 추진 1만6800TEU급 컨테이너선 6척에 대한 LOI를 체결했다고 보도했다. 당시 보도에 따르면 계약금액은 총 12억달러(약 1조7200억원) 규모다.
이 계약 건은 하팍로이드가 지난해 10월 중국 양쯔장조선소에 12척을 주문하며 옵션으로 제시한 물량이다. 하지만 하팍로이드는 양쯔장조선소 대비 가격경쟁력과 인도 가능 시기(2027년)를 고려해 계약 당사자를 한화오션쪽으로 선회하며 옵션을 행사했다. 또 중국 조선업체에 대한 견제를 본격화하고 있는 미국을 의식한 글로벌 선사들이 중국 외 다른 조선소들로 눈을 돌리고 있는 영향도 작용했다는 분석이다.
현재 삼성중공업은 2조원 상당의 액화천연가스 생산·저장·하역설비(FLNG) 4기 수주에 유리한 고지를 밟아가고 있다. 삼성중공업은 이탈리아 ENI, 미국 델핀, 캐나다 웨스턴LNG, 노르웨이 골라LNG 등 4개사에 FLNG를 납품하기 위해 세부 조건을 협의 중이다.
미국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화석연료 회귀’ 정책 여파로 글로벌 에너지 기업의 주문이 몰린 게 1차 원인이지만 중국 조선소 견제의 산물이란 평가다. FLNG를 제작할 수 있는 조선소는 전 세계에 삼성중공업, 중국 위슨(惠生)조선소 두 곳뿐이다. 지난 1월 미국 정부가 위슨조선소를 거래금지 기업으로 지정해 글로벌 기업의 수요가 삼성중공업 한 곳에 쏠렸다는 해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추가 수주 가능성도 높다. FLNG 4기를 건조하기로 한 미국 에너지 기업 델핀이 위슨조선사에 주려던 2기를 삼성중공업으로 돌리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반짝 특수가 오래 가지 못할 것이란 시각도 일각에서 나온다.
글로벌 선사들이 눈앞에 닥친 미국 항만 내 중국산 선박 입항수수료 부과를 피하기 위해 단기적으로 신조 행선지를 한국으로 바꿀 수 있지만 멀리 내다봤을 때 중국 조선소에 이미 발주된 물량을 갑자기 취소하는 등의 섣부른 움직임은 거의 없을 것이란 주장이다.
한 조선업계 관계자는 “글로벌 선사들은 친환경 선박 발주를 검토하고 실제 계약 체결과 건조 및 인도와 이후 운항 선대에 투입하는 데까지 통상 3년 이상 소요되는 것을 잘 알고 있다”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임기 이후까지 보며 관망세를 이어갈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글로벌 선사들은 트럼프 대통령이 재선에 실패할 경우까지 염두해 두고 최근 수개월 사이 수립한 신조선 발주를 중국 조선소에 맡긴다는 당초 계획대로 진행할 가능성이 높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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