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시간, 선생이 말한다. '하얀 석고상'을 그려보라고. 그러니까 검은 "4B 연필"을 가지고서. 무심하게 제안된 이 미션의 끝, 수업 종이 울리자 학생들은 좌절감 속에서 스케치북 위 각자의 "검은 그림"과 대면한다. 이는 번역가 홍한별의 에세이집 처음을 장식하는 일화다. 그에게 있어 이 경험은 '검은 연필'을 들고 "새하얀 형체를 종이 위에 번역"하는 일이었으며, 이는 지난 20여 년간 100여 권의 책을 번역해 온 그가 매번 겪은 '번역 불가능성'과 어려움의 은유다. 클레어 키건, 애나 번스, 버지니아 울프, 수전 손택... 명 작가들의 언어를 옮겨온 번역인의 에세이집이 '번역 불가능성'에 관한 사유라는 역설과 그에 따른 촘촘한 고뇌들. 그리고, 불가능한 것을 설명하기 위해 동원되는 은유와 비유는 처절하게 시적이다. 이 책과 번역을 온전히 소개하는 것 역시 '불가능'의 영역이니 자포자기하고 저자의 언어를 가져올 수밖에. "번역은 탑이고, 배신이고 교환이고, 광기이자 (...) 비유를 통하지 않고는 정의할 수 없는 번역은 흰 고래다".
■ 흰 고래의 흼에 대하여
홍한별 지음 | 위고 펴냄 | 272쪽 | 20,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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