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매거진=MIA 작가] 지난 2월의 끝자락, 개인전을 앞두고 한동안 책 만들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렇게 인쇄를 제외한 나머지 공정을 수작업으로 직접 하는 방식의 작업은 예전에도 해 본 적이 있었지만, 전과 달리 유독 이번에 힘에 부친다는 생각이 드는 까닭은 아무래도 제작 부수 때문인 것 같았다. 예전엔 한정 에디션으로 7부만 제작했지만, 이번에는 초판 100부를 만들어야 했다.
단지 한 자릿수와 세 자릿수라는 차이점이 문자로 쓰면 별것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데 막상 작업을 시작하면 생각이 달라진다. 자르고 모아야 할 종이는 끝이 없(다는 기분이 들)고, 수시로 바꿔야 하는 칼날 조각은 작업대 한쪽에 무심히 쌓여 간다. 작업 시간은 예상보다 늘 모자라는데, 아이러니한 건 그날의 작업을 마치는 시간은 예정된 작업 시간을 초과해서가 아닌, 반복적인 칼질에 손목이 이상 신호를 보낼 때라는 사실이었다.
한번 세어보고 싶었다. 정확한 계산은 아니겠지만 대충이라도. 종이 위에 자를 올리고 칼을 가까이 붙여 위에서부터 아래로 획을 긋는 움직임을 한 번이라고 할 때, 책 한 권을 기준으로 필요한 칼질 횟수는 평균 47번(표지와 간지 4번, 내지 28번, 그 외 다듬기 15번)쯤 된다. 100부를 다 만들기까지는 그러므로, 해야 할 칼질 총횟수는 4700번에 달하는 셈이다.
공정을 번거롭게 만드는 주요 원인을 찾아보자면 역시 책의 꼴 때문이다. 책 표지와 간지의 너비가 다르고 큰 책 안에 작은 책이 들어가며, 내지 중앙에는 한 장 한 장 스탬핑하여 글자를 입력한 편지지가 삽입된다. 그러니 이 작업은 내지 사이즈가 모두 같은 책과 비교했을 때, 기본 공정만도 여러 단계로 나눠 작업할 수밖에 없는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게다가 종류가 다른 종이들을 서로 겹쳐 자를 수 없다는 예상치 못한 변수까지 맞닥뜨렸다. 같은 종류의 종이를 겹쳐서 자르는 건 두께가 좀 있더라도 몇 번의 칼질만으로도 깔끔하게 가능하지만, 종류가 다른 종이는 한 장씩만 겹쳐 잘라도 칼 선이 어긋나거나 찢어져 버리는 일이 반복되었다. 아마도 종이 결이 서로 맞지 않기 때문으로 추측한다. 책 끝이 딱 떨어지는 모양으로 만들려면 제본한 종이를 포갠 상태에서 한 번에 잘라내는 과정이 필요한데, 총 다섯 가지 종류의 종이가 들어가는 이 책은 그런 방식으로 재단선을 맞추기가 불가능했고 번거로운 길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다소 갑갑한 마음이 들면서도, 의외로 새로 밀려드는 감정도 있었다. 그건 어떤 안정감에 비견할만하다. ‘단순노동이라서, 집중할 수 있기 때문에, 손에 종이가 있는 시간만큼은 자질구레한 생각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기 때문에’ 등의 이유도 분명 맞지만, 어쩐지 이럴 땐 조금 더 이상적인 표현이 어울리는 것 같다. 예를 들면 ‘나는 정말 이런 일을 하고 싶었다.’와 같은 문장으로.
나는 정말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것 같다. 삶에서 주제를 건져 내고 이미지로 상상하고 손으로 번역할 통로를 찾은 다음, 다시 구체적인 형태로 이야기를 소환하여 의미를 만들어내기. 그러기 위해 수반되는 과정들-종이를 모으거나 분류하고 칼로 무수히 많은 종이를 거듭 잘라내는-은 어떻게 생각하면 좋을지 고민었지만.
우연히 해답 비슷한 무엇을 발견하긴 했다. 무심코 칼럼 제목을 짓고서 ‘칼질’이라는 표현을 쓸 수 있는지 궁금해져 포털 사이트에 검색해 보았는데, 가장 상단에 뜨는 식당 이름, ‘칼질 만 번 국수’라는 상호를 보게 되었다. 인상적이었다. 칼질이라는 게 어떤 직종에선 이렇게 숨 쉬듯 당연하여 정체성이 될 수도 있는 일이라면 책 제작자의 삶도 마찬가지라는 결론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노동에 가까울, 아니 노동 자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어떤 과정은 ‘하고 싶었던 일’의 본질이라는 가정이 낯설지만은 않은 얼굴로 다가왔다.
누군가 조각은 돌을 깎아 새로운 형상을 창조하는 것이라기보다 돌 안에 숨은 형체를 찾아내는 과정이라고 했던가. 책 제작 과정도 비슷한 방식으로 묘사하고 싶다. 어지러운 종이들 사이를 헤집고 수없이 귀퉁이를 잘라내 버리는 몸짓은 특정한 책의 모양에 도달하기 위해 움직인다. 꼭 거기로만 갈 수 있고 그래야 한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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