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티지 제품으로만 구성한 거실의 테이블과 의자. 테이블은 피에르 귀아리슈, 의자는 앙드레 시마르의 부클 패브릭 의자, 토넷 14번 체어, 에곤 아이어만의 SE18을 섞어서 사용한다.
오늘도 기상과 함께 뜨거운 물 한 잔을 들고 거실로 나가 소파 가장자리에 앉는다. 창밖으로 펼쳐지는 산을 응시하는 잠깐을 제외하면 내 시선은 줄곧 집 안의 가구들에 가닿는다. 집에 덩치 큰 가전이나 살림살이가 거의 없는 까닭에 가구들이 공간의 주된 인상을 만들어낸 탓도 있다. 마치 각자의 자리가 정해져 있는 듯 때론 단호한 존재감을 발하기도 한다. 새하얗고 기다란 사이드보드, 명료한 파란색 네덜란드 소파, 프랑스 디자이너 피에르 귀아리슈의 익스텐션 테이블와 앙드레 시마르의 부클 패브릭 의자, 그리고 토넷 14번 체어.
2년 전 서촌으로 이사를 올 때, 리노베이션을 진행하며 디자이너에게 당부한 점도 ‘가구들이 돋보일 수 있는 중성적인 공간’을 만들어달라는 거였다. 물건을 향한 나의 애착은 가구가 유일한데, 그 어떤 것보다 물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삶과 밀접하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가구는 그 규모와 공간 안에서의 조율, 사용 시의 기능과 견고함이라는 여러 이슈 때문에 선택의 난이도가 무척 큰 소비 영역이다. 뿐만 아니라 패션처럼 트렌드에 따라 휙휙 바꿀 수 있는 아이템이 아니라서 한번 구입하면 최소 10년을 품어내야 하는 가구는 그 맥락을 둘러싼 무게감이 좀처럼 가벼워지지 않는다. 가구에 깃든 이러한 영속적인 성격이 더욱더 첨예하게 자신의 취향과 미감, 인생의 방향과도 연결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뒤집어 생각하면 축복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거실의 파란 소파는 이 집의 유일한 컬러 포인트다.
싱글이던 이십대 후반, 월급을 모아 구입한 덴마크 빈티지 서랍장을 시작으로 빈티지 가구에 발을 들였다. 60년의 시간을 머금은 나무의 결과 윤기, 단정한 형태와 비례는 요즘 만들어지는 가구에서는 느낄 수 없는 대체 불가한 매력이 있었다. 게다가 20세기 초중반, 유럽의 시대적 요구와 함께 쏟아져나온 수많은 디자인과 디자이너들의 활약 안에는 급진적인 실험성과 진지한 디자인적 모색이 담겨 있다는 걸 알면서 애정은 더욱 깊어갔다. 때마침 결혼하면서 본격적으로 가구와의 특별한 여정을 시작할 수 있었다. 1960년대에 구니 오만이 디자인한 사이드보드와 폴 헤닝센의 펜던트 조명, 아르네 야콥센의 세븐 체어가 어우러진 스칸디나비안을 시작으로 따듯하고 정감 어린 작은 아파트에서 한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그토록 정겹게 느껴진 나무 소재가 집 안에 꽉 들어차자 그 분위기가 다소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집 안에 나무가 아닌 것이 없을 정도였다. 티크, 로즈우드 계열의 북유럽 가구들을 정리한 지 얼마 후, 네덜란드 데스틸의 계보를 이은 빔 리트펠트의 메탈 테이블과 프리소 크라머르의 리볼트 체어, 역시 브라스와 크롬 소재가 강조된 1970년대의 이탈리아 조명을 매치하니 엄격하면서도 기능적인 분위기 안에서 컬러풀한 재미가 살아났다. 어쩌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는지 모른다. 인생의 풍향계라 할 수 있는 취향 역시 새롭게 받아들이는 경험치와 미의식 그리고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 변화하게 마련이니까.
다만 가구를 하나하나 만나게 된 계기와 그걸 집에 들여놓기까지의 이유들은 나의 가장 사적인 기억 안에서 쉼 없이 재생된다. 인생 매 순간의 갈망과 동기가 깃든 가구는 가구를 뛰어넘어 하나의 의미가 될 수도 있다는 걸 늘 느낀다. 나는 곧잘 ‘가구와 함께 살고 있다’고 얘기한다. 그러므로 지금 나와 함께 살아가는 가구들은 나의 현재가 지지하고 동의하는 미감, 존재를 둥글게 감싸고 있는 취향 그리고 이유를 알 수 없는 진한 애착으로 여전히 곁에 머물고 있는 어떤 집합체인 것이다. 지금 살고 있는 인왕산 자락의 이 산장 같은 집에는 현시점의 에센스라고 할 수 있는 것들로만 모아두었다.
1 침실에 놓인 지노 사르파티의 566 램프. 유닛 선반은 자크 뒤몽의 디자인. 2 요제프 호프만이 디자인한 암체어로 비엔나 제체시온의 감성이 묻어난다. 3 긴 사이드보드는 강한 존재감으로 집 안의 구심점이 된다. 플로어 램프는 1980년대 이탈리아 스틸노보에서 제작된 것.
앉아 있는 파란 소파는 우리 집의 유일한 컬러 포인트로 그 볼륨과 선이 간결한 네덜란드 디자인이다. 40년은 족히 넘었을 오리지널 패브릭은 색이 한껏 바래고 군데군데 낡았지만 더 좋은 컬러와 텍스처의 패브릭을 찾지 못해 몇 년째 업홀스터리를 미루고 있다. 가로 2m가 넘는 사이드보드는 명료하게 수평선이 강조된 1970년대 독일 디자인으로 양평의 MK2 쇼룸에서 한눈에 반해 겨우 내 것이 되었다. 모든 물건을 붙박이 수납장에 보관하는 한국의 현대 주거 방식에서 이 커다란 가구의 존재는 조금은 과하고 부담스러울지 모르지만, 나는 되려 이 사이드보드에게 ‘집 안의 얼굴’이라는 역할을 부여하기로 했다. 든든하게 공간의 중심을 잡아주는 가구가 늘 그 자리에 우아하게 자리하고 있는 걸 보면 나의 일상이 견고한 잔잔함 속에서 잘 유지되고 있는 듯한 안정감이 든다. 침대 커버와 담요, 아끼는 책들과 음반을 고이 쌓아 보관하고, 필요할 때마다 드르륵 문을 밀어 꺼내는 한껏 느긋한 행위는 정감 어린 생활의 묘미라고도 할 수 있다.
한때 나에게 소소한 컬렉션의 재미를 느끼게 해준 조명들은 이제 딱 다섯 피스만 소장하고 있다. 최소한의 것만 남기겠다는 단호함이 골라낸 진짜 나의 것들인 셈이다. 침실 한켠에는 지노 사르파티의 566 램프가 늘 아늑한 조도를 만들어준다. 이탈리아 디자인의 황금기라 불리는 1950년대에 디자인된 이 조명은 과감한 사선의 메탈 보디와 거길 관통하는 반투명 전구가 일체를 이룬 간결함이 마치 조각 작품처럼 나를 사로잡았다. 우연히 도무스 매거진에서 본 이 램프를 찾겠다는 의지로 유럽에서 두 달을 지내다가 마침내 마지막 여정지인 쾰른의 어느 빈티지 가구 숍에서 마침내 발견한 건 8년 전 여름이었다. 작은 사건이라고 여겨질 정도로 극적인 만남이었다. 에어캡으로 몇 번이나 꽁꽁 감아 포장해 서울까지 품에 안고 온 기억, 덕분에 좋은 친구이자 나의 딜러가 된 가구 숍 주인 마틴과 다시 쾰른에서 재회한 추억은 이 작은 램프 덕분에 영글게 된 에피소드다.
1 루이스 칼프의 Z 램프. 우주선에서 받은 영감이 반영된 디자인이 흥미롭다. 2 여러 형태의 수납이 가능한 르네장 카이예트의 캐비닛.3 거실 창밖으로 인왕산과 북악산이 보인다. 가장 최근에 구입한 요제프 호프만의 암체어에 앉아 있는 박선영 작가.
가장 최근의 컬렉션 목록에는 19세기 말 비엔나에서 활동했던 요제프 호프만의 암체어가 더해졌다. 과거의 전통과 결별하고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예술과 창작을 선언한 ‘분리파’를 대표하는 요제프 호프만은 오랫동안 동경해온 디자이너다. 몇 해 전 비엔나를 방문해 공예박물관과 여러 곳의 쇼룸을 샅샅이 찾아다니며 그의 가구만 훑어본 기억도 있다. 작년 여름, 친한 딜러가 소장하고 있다가 내놓은 이 한 세트의 의자는 주저할 필요 없이 내 것이어야만 했다. 푸른색 벨벳 패브릭, 둥근 프레임과 측면의 원형 장식이 모던 디자인에 비해 한결 장식적이지만, 유럽 장식예술의 끄트머리에서 꿈틀거린 마지막 표현으로 유난히 애틋하게 다가온 까닭이다.
사연을 간직한 건 서재에 놓인 캐비닛도 마찬가지다. 프랑스의 르네장 카이예트의 디자인으로 장식과 수납, 서랍의 기능을 멀티로 갖추고 있으면서도 각 파트의 이음새와 에이징된 합판의 노란 컬러가 조화로운 제품이다. 구입 시기는 4년 전이었는데, 당시에 살던 금호동의 아파트에는 도저히 그 캐비닛을 놓을 자리가 마땅치 않았다. 그렇더라도 ‘언젠가는 쓸 거야’라는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다. 그렇게 한동안 대전의 친정집으로 내려보내 보관하고 있던 가구는 서촌으로 이사하면서 마침내 제자리를 찾게 되었다. 가구와의 동행은 이토록 첨예하지만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충족감을 준다. 물론 현재의 이 충실한 가구들의 매치가 어떤 완결이라고 할 수는 없다. 나의 취향과 삶의 형태가 변해가면서 다시 바뀌고 새로워질 것들을 기다린다. 10년 후 혹은 20년 후쯤에 난 어떤 가구들과 함께 또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가며 살게 될까? 어쩐지 그 기대는 모호함보다는 어딘가로 향하는 예정된 쪽에 더 가깝게 느껴진다.
더네이버, 라이프스타일, 가구
Copyright ⓒ 더 네이버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본 콘텐츠는 뉴스픽 파트너스에서 공유된 콘텐츠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