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생의 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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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생의 가구

더 네이버 2025-02-11 22:33:58 신고

빈티지 제품으로만 구성한 거실의 테이블과 의자. 테이블은 피에르 귀아리슈, 의자는 앙드레 시마르의 부클 패브릭 의자, 토넷 14번 체어, 에곤 아이어만의 SE18을 섞어서 사용한다.

오늘도 기상과 함께 뜨거운 물 한 잔을 들고 거실로 나가 소파 가장자리에 앉는다. 창밖으로 펼쳐지는 산을 응시하는 잠깐을 제외하면 내 시선은 줄곧 집 안의 가구들에 가닿는다. 집에 덩치 큰 가전이나 살림살이가 거의 없는 까닭에 가구들이 공간의 주된 인상을 만들어낸 탓도 있다. 마치 각자의 자리가 정해져 있는 듯 때론 단호한 존재감을 발하기도 한다. 새하얗고 기다란 사이드보드, 명료한 파란색 네덜란드 소파, 프랑스 디자이너 피에르 귀아리슈의 익스텐션 테이블와 앙드레 시마르의 부클 패브릭 의자, 그리고 토넷 14번 체어. 


2년 전 서촌으로 이사를 올 때, 리노베이션을 진행하며 디자이너에게 당부한 점도 ‘가구들이 돋보일 수 있는 중성적인 공간’을 만들어달라는 거였다. 물건을 향한 나의 애착은 가구가 유일한데, 그 어떤 것보다 물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삶과 밀접하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가구는 그 규모와 공간 안에서의 조율, 사용 시의 기능과 견고함이라는 여러 이슈 때문에 선택의 난이도가 무척 큰 소비 영역이다. 뿐만 아니라 패션처럼 트렌드에 따라 휙휙 바꿀 수 있는 아이템이 아니라서 한번 구입하면 최소 10년을 품어내야 하는 가구는 그 맥락을 둘러싼 무게감이 좀처럼 가벼워지지 않는다. 가구에 깃든 이러한 영속적인 성격이 더욱더 첨예하게 자신의 취향과 미감, 인생의 방향과도 연결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뒤집어 생각하면 축복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거실의 파란 소파는 이 집의 유일한 컬러 포인트다.


싱글이던 이십대 후반, 월급을 모아 구입한 덴마크 빈티지 서랍장을 시작으로 빈티지 가구에 발을 들였다. 60년의 시간을 머금은 나무의 결과 윤기, 단정한 형태와 비례는 요즘 만들어지는 가구에서는 느낄 수 없는 대체 불가한 매력이 있었다. 게다가 20세기 초중반, 유럽의 시대적 요구와 함께 쏟아져나온 수많은 디자인과 디자이너들의 활약 안에는 급진적인 실험성과 진지한 디자인적 모색이 담겨 있다는 걸 알면서 애정은 더욱 깊어갔다. 때마침 결혼하면서 본격적으로 가구와의 특별한 여정을 시작할 수 있었다. 1960년대에 구니 오만이 디자인한 사이드보드와 폴 헤닝센의 펜던트 조명, 아르네 야콥센의 세븐 체어가 어우러진 스칸디나비안을 시작으로 따듯하고 정감 어린 작은 아파트에서 한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그토록 정겹게 느껴진 나무 소재가 집 안에 꽉 들어차자 그 분위기가 다소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집 안에 나무가 아닌 것이 없을 정도였다. 티크, 로즈우드 계열의 북유럽 가구들을 정리한 지 얼마 후, 네덜란드 데스틸의 계보를 이은 빔 리트펠트의 메탈 테이블과 프리소 크라머르의 리볼트 체어, 역시 브라스와 크롬 소재가 강조된 1970년대의 이탈리아 조명을 매치하니 엄격하면서도 기능적인 분위기 안에서 컬러풀한 재미가 살아났다. 어쩌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는지 모른다. 인생의 풍향계라 할 수 있는 취향 역시 새롭게 받아들이는 경험치와 미의식 그리고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 변화하게 마련이니까. 


다만 가구를 하나하나 만나게 된 계기와 그걸 집에 들여놓기까지의 이유들은 나의 가장 사적인 기억 안에서 쉼 없이 재생된다. 인생 매 순간의 갈망과 동기가 깃든 가구는 가구를 뛰어넘어 하나의 의미가 될 수도 있다는 걸 늘 느낀다. 나는 곧잘 ‘가구와 함께 살고 있다’고 얘기한다. 그러므로 지금 나와 함께 살아가는 가구들은 나의 현재가 지지하고 동의하는 미감, 존재를 둥글게 감싸고 있는 취향 그리고 이유를 알 수 없는 진한 애착으로 여전히 곁에 머물고 있는 어떤 집합체인 것이다. 지금 살고 있는 인왕산 자락의 이 산장 같은 집에는 현시점의 에센스라고 할 수 있는 것들로만 모아두었다.

침실에 놓인 지노 사르파티의 566 램프. 유닛 선반은 자크 뒤몽의 디자인. 요제프 호프만이 디자인한 암체어로 비엔나 제체시온의 감성이 묻어난다. 긴 사이드보드는 강한 존재감으로 집 안의 구심점이 된다. 플로어 램프는 1980년대 이탈리아 스틸노보에서 제작된 것. 

앉아 있는 파란 소파는 우리 집의 유일한 컬러 포인트로 그 볼륨과 선이 간결한 네덜란드 디자인이다. 40년은 족히 넘었을 오리지널 패브릭은 색이 한껏 바래고 군데군데 낡았지만 더 좋은 컬러와 텍스처의 패브릭을 찾지 못해 몇 년째 업홀스터리를 미루고 있다. 가로 2m가 넘는 사이드보드는 명료하게 수평선이 강조된 1970년대 독일 디자인으로 양평의 MK2 쇼룸에서 한눈에 반해 겨우 내 것이 되었다. 모든 물건을 붙박이 수납장에 보관하는 한국의 현대 주거 방식에서 이 커다란 가구의 존재는 조금은 과하고 부담스러울지 모르지만, 나는 되려 이 사이드보드에게 ‘집 안의 얼굴’이라는 역할을 부여하기로 했다. 든든하게 공간의 중심을 잡아주는 가구가 늘 그 자리에 우아하게 자리하고 있는 걸 보면 나의 일상이 견고한 잔잔함 속에서 잘 유지되고 있는 듯한 안정감이 든다. 침대 커버와 담요, 아끼는 책들과 음반을 고이 쌓아 보관하고, 필요할 때마다 드르륵 문을 밀어 꺼내는 한껏 느긋한 행위는 정감 어린 생활의 묘미라고도 할 수 있다.  


한때 나에게 소소한 컬렉션의 재미를 느끼게 해준 조명들은 이제 딱 다섯 피스만 소장하고 있다. 최소한의 것만 남기겠다는 단호함이 골라낸 진짜 나의 것들인 셈이다. 침실 한켠에는 지노 사르파티의 566 램프가 늘 아늑한 조도를 만들어준다. 이탈리아 디자인의 황금기라 불리는 1950년대에 디자인된 이 조명은 과감한 사선의 메탈 보디와 거길 관통하는 반투명 전구가 일체를 이룬 간결함이 마치 조각 작품처럼 나를 사로잡았다. 우연히 도무스 매거진에서 본 이 램프를 찾겠다는 의지로 유럽에서 두 달을 지내다가 마침내 마지막 여정지인 쾰른의 어느 빈티지 가구 숍에서 마침내 발견한 건 8년 전 여름이었다. 작은 사건이라고 여겨질 정도로 극적인 만남이었다. 에어캡으로 몇 번이나 꽁꽁 감아 포장해 서울까지 품에 안고 온 기억, 덕분에 좋은 친구이자 나의 딜러가 된 가구 숍 주인 마틴과 다시 쾰른에서 재회한 추억은 이 작은 램프 덕분에 영글게 된 에피소드다. 

 1 루이스 칼프의 Z 램프. 우주선에서 받은 영감이 반영된 디자인이 흥미롭다. 여러 형태의 수납이 가능한 르네장 카이예트의 캐비닛.거실 창밖으로 인왕산과 북악산이 보인다. 가장 최근에 구입한 요제프 호프만의 암체어에 앉아 있는 박선영 작가.


가장 최근의 컬렉션 목록에는 19세기 말 비엔나에서 활동했던 요제프 호프만의 암체어가 더해졌다. 과거의 전통과 결별하고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예술과 창작을 선언한 ‘분리파’를 대표하는 요제프 호프만은 오랫동안 동경해온 디자이너다. 몇 해 전 비엔나를 방문해 공예박물관과 여러 곳의 쇼룸을 샅샅이 찾아다니며 그의 가구만 훑어본 기억도 있다. 작년 여름, 친한 딜러가 소장하고 있다가 내놓은 이 한 세트의 의자는 주저할 필요 없이 내 것이어야만 했다. 푸른색 벨벳 패브릭, 둥근 프레임과 측면의 원형 장식이 모던 디자인에 비해 한결 장식적이지만, 유럽 장식예술의 끄트머리에서 꿈틀거린 마지막 표현으로 유난히 애틋하게 다가온 까닭이다. 


사연을 간직한 건 서재에 놓인 캐비닛도 마찬가지다. 프랑스의 르네장 카이예트의 디자인으로 장식과 수납, 서랍의 기능을 멀티로 갖추고 있으면서도 각 파트의 이음새와 에이징된 합판의 노란 컬러가 조화로운 제품이다. 구입 시기는 4년 전이었는데, 당시에 살던 금호동의 아파트에는 도저히 그 캐비닛을 놓을 자리가 마땅치 않았다. 그렇더라도 ‘언젠가는 쓸 거야’라는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다. 그렇게 한동안 대전의 친정집으로 내려보내 보관하고 있던 가구는 서촌으로 이사하면서 마침내 제자리를 찾게 되었다. 가구와의 동행은 이토록 첨예하지만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충족감을 준다. 물론 현재의 이 충실한 가구들의 매치가 어떤 완결이라고 할 수는 없다. 나의 취향과 삶의 형태가 변해가면서 다시 바뀌고 새로워질 것들을 기다린다. 10년 후 혹은 20년 후쯤에 난 어떤 가구들과 함께 또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가며 살게 될까? 어쩐지 그 기대는 모호함보다는 어딘가로 향하는 예정된 쪽에 더 가깝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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