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혜원 칼럼] 작업실을 정리하며②에 이어
[문화매거진=정혜원 작가] 1월 31일은 작업실 계약 마지막 날이었다. 긴긴 설 연휴 동안 달력을 들여다보며 잊지 않고 마지막 월세를 보내기 위해 벼르고 있었는데 당일 아침 6시, 건물주에게서 문자가 왔다. 마지막 월세를 제외하고 보증금을 돌려줄 테니 계좌번호를 알려달라고, 그동안 고마웠다고.
건물주는 작업실 건물 위층에 살고 있었다. 그래서 갓 계약했을 무렵 매일 같이 작업실에 드나들 때는 오다가다 종종 마주쳤다. 이후 작업실에 발길을 끊다시피 하여 건물주를 만날 일이 통 없었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애써 단장한 공간을 잘 운영하지 못하고 그냥 방치하는 꼴을 보이고 있자니 창피했다. 어쩌다 필요한 물건이 생겨 별수 없이 작업실에 가지러 갈 때면 건물주와 마주치지 않기를 빌었다. 뭐가 그렇게 떳떳하지 못했던 걸까. 월세를 밀린 것도 아니고, 공간을 험하게 쓰거나 건물에 피해를 준 것도 아닌데 괜히 마음이 켕겼다.
건물주가 건넨 고마웠다는 말 한마디에 켕겼던 마음이 스르르 풀렸다. 그리고 아쉬움이 밀려왔다. 다음번에는 좀 더 준비된 상태로 작업실을 얻어 오랫동안 머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턱대고 공간을 계약하여 일 년간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는지 금세 잊고 벌써부터 다음을 기약하고 있었다. 아직 혼이 덜 났나 보다.
하지만 마지막이 되고 보니 정말 시원하고도 섭섭했다. 돌이켜보면 별로 나쁘지 않은 공간이었다. 문 앞 주차 공간에 늘 다른 사람의 차가 대어져 있다든지, 옆 가게와 슬레이트 벽 하나로 나뉘어 있어 서로의 생활 소음이 고스란히 들린다든지 하는 몇 가지 문제로 골머리를 앓긴 했지만, 적어도 건물주만큼은 세입자에게 이래라저래라 간섭하는 법 없이 점잖은 사람이었다. 건물주에게 계좌번호를 적어 보내면서 나도 감사했다고, 건강하시라고 짧게 덧붙였다.
이사는 진즉에 끝나 있었다. 두 달 전, 계약을 연장하지 않겠다고 고지하기 전부터 틈틈이 작업실 짐을 집으로 날랐다. 솔직히 말해 작업실을 말아먹었다는 실패감과 패배감에 젖어 이삿짐을 꾸리기는커녕 작업실을 마주할 기운조차 나지 않았었다. 말 그대로 쳐다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포장이사 업체에 맡겨 버릴 수도 없었다. 이삿짐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자잘하면서도 망가지기 쉬운 미술 도구나 공예 도구였다. 남의 손에 맡기기엔 불안하고 그럴만한 규모도 아니었다. 끝을 내려면 반드시 직접 스스로가 벌인 일에 직면할 필요가 있었다. 작업에 쓰던 각종 도구를 손에 잡히는 대로 차에 싣고 집까지 날랐다. 세 번 오갔더니 얼추 정리가 됐다.
가구나 가전제품 같은 것은 승용차에 실리지 않아서 용달차를 불러 옮겨야 했다. 아늑한 작업실을 꾸리기 위해 크기며 모양을 세심하게 따져 장만한 집기들이 충분히 쓰이지도 못하고 고스란히 짐이 되고 말았다. 특히 에어컨이 문제였다. 난방 기능까지 갖춘 것, 에너지 효율이 높은 것을 찾다 보니 애초에 큰돈이 들어갔는데 이전 설치비가 또 수십만 원 나왔다. 에어컨 기사가 견적을 내 보더니 자기가 느끼기에도 너무 많이 나왔다며 연신 안타까워했다. 다시 한번 ‘모든 게 돈’임을 실감한 순간이었다. 공간을 꾸릴 때나 접을 때나 미처 예상치 못한 지출이 발생하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에어컨을 철거하면서 전면 유리에 달았던 커튼도 함께 떼었다. 그 커튼은 바깥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불특정 다수의 시선으로부터 나와 내 공간을 차단하는 보호막이었다. 처음 계약할 때만 해도 상가 1층에 위치한 전면 통유리 공간이라는 점에 매료되었다. 많은 이가 찾는 열린 공간으로 작업실을 운영하고 싶다는 로망이 있었다. 하지만 알고 보니 나는 그리 열린 사람이 아니었다. 인테리어가 미흡한 작업실이 외부에 훤히 드러나는 것이 점점 부담스러워졌고, 야무지게 운영하는 모습을 보여 주지 못해 내심 창피했다. 낯선 사람이 안을 기웃거리다가 불쑥 들어올 때면 소스라치게 놀랐고, 붙임성 좋은 이웃 상인이 자꾸 찾아와 말을 걸 때면 무서운 한편 귀찮았다.
커튼을 쳤다. 커튼은 내 존재뿐만 아니라 초라한 내 공간도 가려 주었다. 더 나아가 작업실에 출입하지 않게 되었을 때는 주인이 부재하여 휑뎅그렁하니 방치된 모습도 가려 주었다. 이래저래 위안이 됐다. 나는 원래 남의 시선을 의식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도 작년에는 나 자신이 스스로에게 너무도 창피한 나머지 세상 모든 사람 앞에서 창피했었다. 마냥 숨고 싶고 사라지고 싶었다. 당당함은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뒷받침되어야 하는 거였다.
작업실에 있던 도구와 집기는 집 한편에 쌓아 두었다가 조금씩 정리하여 모두 제자리를 찾았다. 기껏 사 놓고 충분히 쓰지 못했던 책상과 책장은 내 방에 배치했다. 내키면 언제든지 작업을 이어 가기 위함이다. 작업실에 놓였을 때는 한없이 작고 초라해 보이던 가구들이 비좁은 방에 놓이자 어울리지 않게 비대해 보였다. 작업과 생활을 분리하여 한결 숨통이 트였던 내 방이 작업실을 없앰으로써 다시 북적이게 된 것은 유감이다. 책상 위에는 그리다 만 그림을 올려 두었다. 작년 봄부터 줄곧 멈춰 있던 그림이다. 이제 직장에 다녀 시간이 부족하지만 매 주말 이어 그리고 있다.
그림을 그리는 일이 다 무슨 소용인가 싶을 때가 있다. 하물며 디지털에서 인공지능으로 넘어가는 이 시대에 아날로그 방식으로 그림을 그리는 일은 앞으로 내가 먹고사는 데 영영 도움이 되지 않을 것만 같다. 하지만 당장은 의심과 회의를 거두고 그리다 만 그림을 마저 그리기로 한다. 내 사주에 나타나 있다질 않나. 한 치 앞이 어둠. 그다음 일은 그다음에 생각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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