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매거진=정서원 작가] 알렌 페델 케밤은 비재현적 캐릭터와 조형적 실험을 결합해 독특한 내러티브 드로잉을 구축한다. ‘Scriber Stories’ 연작은 한 패널로 이루어진 만화 형식을 차용해 압축적인 이야기와 시각적 유희를 담아낸다. 그의 작품 속 캐릭터들은 서사를 지니고 있지만, 특정한 줄거리로 귀결되지 않는다. 간결한 텍스트와 이미지가 결합하면서도, 그 속에는 쉽게 해독되지 않는 낯선 분위기가 존재한다. 그의 작업은 우리가 익숙한 내러티브 구조에서 벗어나, 이미지와 언어가 만나면서 새롭게 형성되는 의미를 탐구하는 시도다.
‘4분 34초’는 정지된 듯한 화면 속에서도 끊임없이 변화하는 감각을 담아낸다. 이 전시에서 작품들은 단순한 시각적 결과물이 아니라 시간이 녹아 있는 하나의 악보처럼 작동한다. 존 케이지가 침묵 속에서 소리를 발견하도록 유도했듯이, 이 전시는 익숙한 사물과 풍경을 다시 들여다보게 만든다. 관람자는 작품을 마주하며 자신이 지나쳐온 공간과 시간의 결을 새롭게 감각할 수 있을 것이다.
존 케이지의 ‘4분 33초(4'33")’는 단순한 침묵이 아니라 음악의 개념을 근본적으로 확장하는 작업이었다. 그는 소리가 없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소리라고 규정하지 않은 것들을 새롭게 인식하도록 유도했다. 이는 단순한 결핍이 아닌, 지각의 변화를 요구하는 방식이었다. 4분 33초 동안 연주자가 아무런 소리를 내지 않는 동안 관객은 자신의 호흡, 공간 속의 작은 떨림, 예상치 못한 소음들을 감각하게 된다.
침묵은 하나의 상태가 아니라 의미가 만들어지는 과정이며, 이 과정 속에서 관객은 오히려 듣지 못했던 것들을 듣게 된다. 이러한 개념은 단순히 음악에 국한되지 않는다. 지금의 시대는 정보와 이미지로 과포화된 환경 속에서 지나치게 많은 것들을 소비하지만, 정작 우리가 '보는 것'과 '듣는 것'에 대한 감각은 점점 무뎌져 간다.
이번 전시는 이러한 감각의 무뎌짐 속에서 익숙한 풍경과 장면을 다시 바라보게 하는 회화의 힘을 보여준다. 하지만 더 나아가, 우리가 지나쳐버린 장면과 순간들이 여전히 우리를 둘러싸고 있으며, 그것들을 새롭게 마주하는 방식이 필요하다는 점을 제안한다. 우리는 일상을 너무 당연하게 소비하고, 지나간 순간을 회상하기보다는 곧바로 다음의 것들을 탐색하려 한다.
예술은 이러한 흐름 속에서 멈춰 서게 만들고, 지나쳐온 시간과 공간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 되묻게 한다. 4분 33초가 관객을 침묵 속으로 이끌어 듣지 못했던 소리를 들리게 했듯이 ‘4분 34초’는 정지된 장면을 통해 움직임을, 익숙한 이미지를 통해 낯선 감각을 깨우는 역할을 한다. 회화는 단순한 재현이 아니라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것들을 감각하게 만드는 장치다. 이 전시는 단순히 보는 행위를 넘어 우리가 망각한 감각의 층위를 다시 열어놓으며 사유의 틈을 만들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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