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은 양가적 속성을 띤다. 어떤 기억은 잊지 못해 힘들고, 어떤 일은 기억하지 못해 슬프다. 뉴욕에서 딸과 단둘이 살아가는 실비아는 잊을 수 없는 기억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사람이다. 그는 어린 시절 겪은 사건이 트라우마가 되어 모든 남자를 경계하며 살아간다. 그런데 어느날 고등학교 동창 파티에 참석한 실비아를 어떤 낯선 남자가 따라나서 집까지 쫓아온다. 순간 실비아는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가 떠올라 극심한 공포에 사로잡힌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 두려움에 떤 게 실비아만은 아닐 것이다. 많은 여성 관객이 이 장면에서 낯익은 공포를 느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애초에 미셸 프랑코 감독은 한 남자가 길거리에서 한 여자를 따라가는 장면을 떠올리며 영화 <메모리>를 구상하기 시작했다고. 그가 떠올린 건 복수극이었지만 여동생과의 대화를 통해 사랑 이야기로 발전시켰다.
스토커와 사랑에 빠지게 된 건가? 실비아가 사울을 용서할 수 있었던 건 그가 실은 기억을 잃는 병, 치매를 앓고 있었기 때문. 밤새 두려움에 떨던 실비아는 아침까지 초라한 행색으로 자신의 집 앞에서 벌벌 떨고 있는 사울을 발견했고 뭔가 이상함을 감지했다. 오해도 있었다. 사울을 자신에게 몹쓸 짓을 했던 고교 동창으로 착각한 것.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던 실비아에게 사울의 가족이 사울을 좀 돌봐달라고 부탁하면서 실비아와 사울은 이내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게 된다. 사울이 발가벗은 채 욕실에 누워 있는 것을 실비아가 일으켜주는 장면에서 볼 수 있듯이 ‘정신이 온전치 못한’ 사울을 돌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겠지만, 본업이 성인 데이케어센터 직원인 실비아는 능숙하게 사울을 돌본다. 하지만 둘은 점차 서로를 돌보는 관계로 발전하는데….
그 단계에 이르기까지는 서로의 아픔을 공유하는 시간이 있었다. 이전에 나온 내용을 자꾸만 잊어버려 영화를 보기 어려운 사울은 실비아와 함께 영화를 보며 실비아가 우는 장면에서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린다. 서로가 서로에게 스며들기 시작했음을 암시하는 장면이었다. 실비아는 그를 멀리하려 했지만 그들의 관계는 점차 깊어지고, 사울은 실비아의 감춰진 상처를 알게 된다. 가족에게 또다시 상처받고 집으로 돌아온 실비아는 욕조 물에 깊이 잠겨 발가벗은 채 운다. (실비아의 상처가 무엇이었는지는 그새 잊었을지도 모를 사울이지만) 이제 그는 그 울음을 듣고 찾아가 물속에 첨벙 빠져든다. 그들은 함께 웃는다. 서로를 보듬으며. 처음에는 발가벗은 모습을 보인 쪽은 사울, 옷을 입은 채 취약한 그를 돌봐주는 건 실비아의 몫이었지만, 이제 그 둘은 서로의 발가벗은 모습을 보여주고 보듬어줄 수 있는 사이가 되었다.
<메모리>를 ‘사랑 이야기’라고만 하기에 아쉬운 건 이 영화가 돌봄과 치유, 가족, 관계, 기억, 트라우마 등 다양하고 중요한 주제를 아우르기 때문이다. 특히 이 영화는 존재의 가치를 위협할 정도로 중대하지만 우리의 삶과 맞닿아있는 주제―즉 노화에 따른 흔한 질병인 치매와 잊을 수 없는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를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관객이 당사자가 되어 함께 아파하고 질문할 수 있게 한다. 기억을 잃어간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트라우마가 된 기억을 가장 가깝다고 생각한 가족에게 고백했는데 믿어주지 않는다면? 서로의 취약한 모습도 내보일 수 있는 관계라면 혈연으로 이어진 가족보다 더 깊은 관계라고 할 수 있지 않나? 그런 관계 안에서 드디어 우리는 우리 자신으로서, 있는 그대로 존재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사울처럼 기억을 잃지 않아도, 실비아처럼 어린 시절 끔찍한 폭력을 경험하지 않았어도, 우리는 저마다 아픔을 지니고 살아간다. 나의 아픔은 오롯이 나의 것이라며 아픔을 나누지 않고 혼자서만 꼭꼭 간직하고 있으면 외롭다. 완벽하지 않고 약한 존재가 바로 인간이다. 우리는 서로의 취약함을 드러내고 돌봄으로써 더 온전해지는 게 아닐까.
칸영화제 3관왕, 베니스영화제 심사위원대상 수상 감독 미셸 프랑코의 첫 로맨스 영화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수상자 제시카 차스테인과 베니스영화제 남우주연상 수상자 피터 사스가드의 빛나는 열연이 돋보인다. 지난 22일 개봉.
[독서신문 이자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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