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여민의 뮤지엄 노트] 나는 원을 그리며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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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여민의 뮤지엄 노트] 나는 원을 그리며 나아간다

문화매거진 2025-01-21 14:25:03 신고

▲ 칸딘스키(Kandinsky, Wassily/러시아) 노랑-빨강-파랑(캔버스에 유채/128x201.5cm/1925년)
▲ 칸딘스키(Kandinsky, Wassily/러시아) 노랑-빨강-파랑(캔버스에 유채/128x201.5cm/1925년)


[문화매거진=최여민 작가] 나는 원을 그리며 나아간다. 몇 년 전부터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던 이 문장은 어김없이 나의 다이어리 첫 페이지를 장식한다. 해가 바뀌는 것은 단순히 숫자가 하나 더 늘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한 해의 끝과 시작이 맞닿아 있는 지금이야말로 지난날을 돌아보기에 가장 적절한 순간이다.

빽빽하게 채운 다이어리를 아무리 앞뒤로 넘겨봐도 분명하게 쌓인 것은 나이뿐이다. 선명한 글씨들 사이로 흐려지는 미래를 끌어안고 터벅터벅 길을 걷는다. 그러다 가까워지는 차 소리에 반사적으로 몸을 피하며, 그 순간 누구보다 뚜렷한 삶의 의지를 확인한다.

벽에 바짝 붙인 몸을 끌고 작년과는 다른 무언가를 찾아보려 침착하게 자리에 앉는다. 목표를 세우려 했지만 정작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 돈과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삶, 끊임없는 자기 계발과 성취를 이루는 삶, 현재에 감사하며 균형을 찾는 삶, 배려와 사랑을 실천하며 공동체에 기여하는 삶. 어느 시기엔가 나름의 이유로 그 삶을 선택했지만, 점차 어딘가 맞지 않는 듯해 멀어져 버렸다. 비현실적인 이상을 좇는 것을 경계하면서도, 현재를 기준으로 미래의 가능성을 폄하하지 않는 목표를 세워야 한다.

그때마다 내게 선물처럼 와준 문장을 되새긴다. “나는 원을 그리며 나아간다.” 필승을 다짐하는 약간의 정신 승리와, 언제나 잘될 수만은 없다는 현실적인 고민을 묻힌 채 문장을 낳았다.  어떤 삶을 좇든 앞으로 나아갈 때에는 뒤로 물러날 가능성을 염두에 두며 지나치게 들뜨지 않고, 뒤로 가더라도 다시 앞으로 나아갈 순간을 기다리며 지나치게 낙담하지 않는다. 돌고 돌아도 결국 앞으로 나아가는 나만의 이야기를 적어 내려간다.

문장으로 내 흔적을 남기는 것처럼, 칸딘스키는 색과 형태로 자신을 남긴다. 그는 러시아 출신의 화가이자 이론가로, 최초의 순수 추상화를 탄생시켰다. 순수 추상화는 구체적인 대상을 재현하지 않고 색, 형태, 선 등의 조형 요소만으로 구성된 예술 양식으로, 작품 자체의 조형적 요소와 구성을 통해 미술 고유의 감각적인 표현을 극대화한다. 

‘노랑-빨강-파랑’은 노랑, 빨강, 파랑이라는 세 가지 주요 색상을 중심으로, 대비 속에서도 조화를 이루는 구성을 선보인다. 각 조형 요소는 서로 얽히면서도 긴장감을 유지하며, 상호 작용을 통해 동적인 구조를 형성한다. 이러한 움직임은 작품 전체에 생명력을 불어넣고, 보는 이에게 강렬한 에너지를 전달한다. 이러한 특성은 추상의 힘을 한층 강화하며, 회화가 서사를 넘어 순수한 시각적 경험으로 존재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칸딘스키는 단순히 형태와 색채를 결합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를 통해 새로운 미술적 언어를 창조했다. 그의 작품은 겉으로는 단순해 보이지만, 감상자의 내면 깊숙이 스며들어 직접적인 감정적 반응을 불러일으킨다. ‘노랑-빨강-파랑’ 역시 단순한 시각적 감상을 넘어, 그 안에 담긴 에너지를 느끼고 상상력을 통해 재해석하도록 유도한다. 

굳건한 믿음으로 바라본 칸딘스키의 작품은 내 마음을 사정없이 흔든다. 순수한 색과 형태는 어떤 것도 가리키지 않지만, 묘하게도 작품을 바라보는 순간 자연스럽게 나의 서사가 겹쳐진다. 작품에서 원과 선, 색이 얽히고설키면서 균형을 이루듯 떠오르기도, 가라앉기도 하며 걸어온 원의 길을 돌아본다. 내 눈에는 선명한 삶의 좌절, 반복, 성장, 그리고 순환이 공존하고 있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 속에서 끝내 사라지지 않는 희망이 함께한다. 칸딘스키가 전하는 무한한 에너지를 느끼며 그렇게 나는 또 한 번 원을 그리며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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