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사회적 편견과 침묵의 문화”가 어떻게 데이트 폭력을 은폐하고, 피해자를 더 깊이 고립시키는지 살펴봤습니다.
이제는 구체적으로 ‘침묵’과 ‘피해자 탓하기(Victim Blaming)’가 어떤 식으로 우리 사회를 옥죄고 있는가, 그리고 이 벽을 어떻게 허물어야 하는가에 대해 조금 더 깊이 이야기해 보려 합니다.
피해자가 단 한 명이라도 제대로 된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그것은 곧 우리 모두가 한 걸음 더 나은 사회로 나아간다는 의미가 아닐까요?
1) 데이트 폭력을 부끄럽게 여기며 숨기는 현실
1-1. “부끄러워서 말을 못 하겠어요.”
이 문장을 종종 상담 현장이나 주변 지인에게서 듣습니다. 피해자는 폭력을 당한 당사자인데도 왜 “내가 잘못한 것 같고, 사람들에게 부끄럽다”고 느낄까요? 이는 데이트 폭력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여전히 낮고, 피해자를 향한 시선이 따가울 수 있다는 점 때문입니다. “괜히 소문이라도 날까 봐 무서워요”라는 분도 계시죠.
1-2. 특히 여성 피해자의 경우
우리 사회에서 여성은 여전히 “조신해야 한다”, “함부로 연애 상대를 고르면 안 된다” 같은 은근한 잣대를 강요받곤 합니다. 때문에 폭력을 당해도 ‘내가 이상한 선택을 했기 때문’이라며 스스로를 탓하기 쉬워요. 심지어 주위에서도 “처음에 사람 잘못 봤네”라며 한마디씩 보태기 때문에, 피해자는 더욱 마음의 문을 닫고 침묵하게 됩니다.
2) 피해자 탓하기(Victim Blaming)의 대표적 사례
2-1. “너도 뭔가 문제가 있으니까 맞은 거 아니야?”
아무리 말이 안 되는 논리 같아도, 실제로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그들은 폭력적인 가해자의 행동보다 피해자의 행동을 먼저 파고들죠. 예를 들어, “그날 화를 돋운 건 네 말투였잖아?”, “네가 먼저 약속 시간을 어겼으니까 화난 거 아니야?” 같은 식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다시 한번 짚어야 합니다. 어떤 이유가 있든, 폭력을 행사하는 것 자체가 잘못입니다. 갈등이 생겨도 해결할 방법은 많습니다. 언성을 높이거나 물리력을 쓰는 순간, 그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가해 행위가 됩니다.
2-2. “왜 그냥 헤어지지 않았어?”
피해자가 데이트 폭력을 이야기하면 이런 질문이 반드시 나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간단해 보이죠. 하지만 정작 폭력의 굴레에 빠진 사람은 신체적·정서적·경제적 이유로 인해 쉽게 관계를 정리하지 못합니다.
“협박이 무서워서” 혹은 “경제적으로 얽혀 있어서” 등 현실적인 이유부터, “그래도 애정이 남아서”라는 복합적인 감정까지, 다양한 원인이 겹쳐 있죠.
그럼에도 “왜 헤어지지 않고 참고 있었어?”라는 말은 오히려 피해자를 더 코너에 몰아넣습니다. 폭력 피해의 책임은 가해자에게 있음에도, 피해자를 무책임한 사람처럼 보이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3) 침묵의 문화와 개인적·사회적 결과
3-1. 가해자에게 더 유리한 환경
피해자가 입을 다물고 숨어 버리면, 가해자는 책임을 회피하기 쉬워집니다. 심지어 주변에서 “그 정도 가지고 뭘 그러느냐”는 반응을 보이면, 가해자는 더욱 당당해지죠.
뚜렷한 신고나 제재가 없으니, 자신이 해온 행위를 ‘그저 연인끼리의 문제’로 치부하며, 다음 피해자를 만들 수도 있습니다.
“침묵”은 결국 폭력을 지속시키는 기제로 작동합니다.
3-2. 피해자의 트라우마와 장기적 상처
오랫동안 지속되는 폭력에 노출된 피해자는 극심한 우울감, 불안,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등을 겪을 수 있습니다. 게다가 주변으로부터 “네 탓이잖아”라는 반응까지 들으면, “나는 아무 가치도 없는 사람인가?”라는 극단적 자기 비하에 빠지기도 해요.
이는 사회 전체의 생산성, 구성원 행복도에도 악영향을 미칩니다. 결국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함께 해결해야 할 공동체적 과제로 봐야 한다는 뜻이죠.
4) 사회적·심리적 배경: 왜 침묵이 계속되는가?
4-1. ‘피해자다움’에 대한 왜곡된 기대감
사람들은 막연히 ‘피해자는 처음부터 강하게 반발하거나, 바로 신고하고, 눈물을 흘리며 도움을 청한다’는 식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훨씬 복잡해요.
폭력 속에서도 “나도 잘못이 있었겠지”라며 자책하고, 신고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우리가 ‘피해자라면 이래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버리지 않으면, 실제 피해자들은 더욱 침묵 속에 방치됩니다.
4-2. 가스라이팅, 애착이론 등 심리학적 측면
가해자가 피상적인 애정 표현과 폭력을 반복하면, 피해자는 혼란에 빠집니다. 스스로 ‘이건 폭력이야’라고 인식하려고 해도, 며칠 후 “미안해, 너밖에 없어”라는 달콤한 말에 다시 마음이 녹아버리는 거죠.
이런 심리적 조종(가스라이팅)이 지속되면, 피해자는 점점 “어쩌면 내가 예민한 걸지도…”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여기에 불안정 애착을 지닌 사람이면 “이 사람조차 없으면 난 어떻게 살지?”라는 두려움이 커지면서, 폭력적 관계를 끊기 더욱 힘들어집니다.
5) 함께 벗어날 길: 바뀌어야 할 사회와 우리의 역할
5-1. 피해자를 믿고 경청하기
가장 먼저 필요한 건, 피해자가 겪었다는 말을 있는 그대로 믿어 주는 태도입니다. “정말이야?” “설마 네가 과장한 건 아니지?” 같은 말은 피해자를 다시 침묵하게 만듭니다.
주변인이 피해자의 말을 진심으로 들어주고, “너는 잘못이 없고, 이 일의 책임은 가해자에게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면, 피해자가 용기를 내서 상황을 개선하거나 신고·상담을 받으러 갈 확률이 훨씬 높아집니다.
5-2. 적극적인 제도적·법적 보호
데이트 폭력이 일반적 폭력과 별개로 인식되지 않도록, 법적 기준이 명확히 정비되어야 합니다. 실제로 스토킹 처벌법, 교제 폭력에 대한 처벌 강화 등 다양한 논의가 이뤄지고 있지만, 피해자가 체감하기에는 여전히 부족한 부분이 많다는 지적이 있어요.
특히 관계를 정리하려 할 때 가해자가 더 심하게 폭력적으로 돌변하는 사례가 적지 않기에, 안전을 보장할 임시 보호 명령, 접근 금지 등 현실적인 대책이 필요합니다.
5-3. 전문가와의 상담, 그리고 자조 모임
폭력의 굴레에서 빠져나온 뒤에도, 피해자에게는 긴 치유 기간이 필요합니다. 심리 상담, 트라우마 치료, 자조 모임 등 다양한 형태의 지원이 이뤄져야 해요. 실제 상담 사례를 보면, 피해자들이 자기 경험을 나누고 공감받을 수 있는 장이 생기면 “나 혼자가 아니구나”라는 안도감을 크게 느낀다고 합니다.
침묵 속에 홀로 머물렀던 시간을 벗어나, ‘내가 겪은 일이 폭력이었고, 내 잘못이 아니다’라는 걸 확실히 인식하는 과정이 중요합니다.
5-4. 더 이상 두려워 말고, 함께 목소리를 내자
아직까지 데이트 폭력을 겪고 있거나, 과거의 폭력에서 벗어났지만 트라우마로 힘들어하는 분들이 계시다면, 절대 혼자서 이겨내려 애쓰지 않길 바랍니다. 이는 개인의 문제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사회적이고 구조적인 문제예요.
‘침묵의 문화’와 ‘피해자 탓하기’가 사라지려면, 더 많은 사람이 이 문제를 공론화하고, “폭력은 안 돼”라고 분명하게 말해야 합니다.
가해자를 옹호하는 환경이 아니라, 피해자의 목소리를 지지하는 환경이 자리 잡을 때까지, 우리 모두가 귀 기울이고 행동해야 하죠.
데이트 폭력이 부끄러운 일이 절대 아닙니다. 부끄러워해야 할 사람은 폭력을 행사한 가해자이지, 결코 피해자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사회적 편견과 침묵의 문화가 피해자를 더욱 죄책감에 빠지게 만들고, 신고나 도움 요청마저도 어렵게 하죠.
이제는 목소리를 내야 할 때입니다. “나만 이런 게 아닐까?”라는 불안이 들더라도, “나만 겪는 게 아니다”라는 걸 알아주세요. 그리고 주변에 도움이 필요해 보이는 사람이 있다면, 먼저 말을 건네고 관심을 보여 주세요. 작은 말 한마디가 때론 그 사람에게 가장 큰 희망이 될 수 있습니다.
By. 나만 아는 상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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